1998년 국내 중견기업 이사직을 끝으로 명예퇴직한 박모(59)씨는 올초 셋째딸(26)로부터 각서 한 장을 받았다. 내용인즉 “영국 유학을 다녀온 뒤에도 최소 5년은 직장생활을 하겠다”는 것. “대학 마칠 때까지 등록금에 용돈까지 대주고 동남아 영어연수도 보내줬는데, 취업한 지 겨우 2년 만에 불쑥 외국으로 떠난다니 선선히 보내줄 수 없죠. 실컷 돈 들여 공부하고 돌아와 곧장 시집가겠다고 하면 우리집 기둥뿌리 뽑는 것으로도 모자라 지붕마저 내려앉을 테니까요.” 박씨는 딸 넷을 뒀다. 맏이가 대학생이고 나머지 셋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명예퇴직해 의류소매업으로 네 딸을 어렵게 공부시켰다. 지난해 막내딸이 대학을 졸업하면서 마침내 무거운 짐을 좀 더나 싶었다. 그런데 졸업 직후 결혼한 맏이를 제외하곤 세 딸 모두 사실상 그의 울타리를 못 벗어나고 있다. 2001년 수도권 소재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둘째딸은 1년 넘게 구직에 매달리다 포기한 뒤 그와 함께 옷가게를 운영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온 막내딸은 2년째 구직 중이다. 셋째딸이 유일하게 졸업과 동시에 취업했는데, 지난해 말 사표를 내고 영국 유학을 준비 중이다. 박씨는 “요즘 매일 누군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다”고 말한다. “10년 전 퇴직금과 아파트 담보 대출금으로 사업을 시작할 땐 그래도 자신감이 있었어요. 지금보다 젊었고, 10년만 고생하면 아이들도 제 밥벌이를 할 테니 그때까지만 뒷바라지 하고 그 뒤엔 우리 부부와 어머니 노후 생활비나 벌면 되리라 생각했죠. 노후자금은커녕 빚만 늘어서 아파트마저 팔고….” 지방의 가난한 집안 외아들로 태어난 박씨는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남의 집 살림해서 번 돈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대기업은 아니지만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회사에 들어갔다. 홀어머니는 고생하며 아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킨 걸 자랑스러워했다. 1990년대 초 서울 강북의 50평형대 아파트로 이사할 때, 어머니는 아들의 대학등록금 낼 돈이 부족해 죽은 남편의 형제들에게 손 벌려야 했던 마음고생을 다 보상받았다며 기뻐했다. 그런데 지난해 박씨 가족은 아파트를 팔고 평수를 줄여 빌라로 이사했다. 박씨는 그날 어머니가 눈물 훔치는 걸 몇 번이나 목격했다.
“지 애비 등골 다 빼먹고…” “사업을 했지만 벌이가 신통치 않았어요. 아이들 교육비에 생활비를 감당하려니 대출금과 카드 빚만 불어나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처럼 불안했어요.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아파트를 팔아 되는 대로 빚을 정리했지요. 어머니가 지금도 속상해하세요. 저야 아이들이 더 좋은 대학에 못 간 게 꼭 제 무능력 탓인 것만 같아 미안하지만, 어머니는 다르죠. 아이들과 어머니 사이에 골이 깊어졌어요.” 팔순을 넘긴 노모로선 대학까지 나온 말만한 손녀들이 밥값을 못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지 애비 등골 빼먹다 시집가면 그만이지.” 둘째딸(29)은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 가슴을 후벼 판다”고 말한다. “할머니는 아버지 고생하시는 게 마음 아파 그런다는 걸 알지만 속상하죠. 할머니가 아버지를 대학 보내셨을 땐 4년제 대학 졸업장이 ‘취업 허가증’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구직자 중에 4년제 대학 안 나온 사람 있나요? 대학 졸업장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데…. 저나 동생들이나 답답하죠. 고등학교만 졸업한 엄마는 제 나이에 자식을 넷이나 낳았는데 전 아직 미혼에다 모아둔 돈도 없으니까요.”
실제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 대학생수(전문대, 일반대, 교육대, 대학원 포함)는 1975년 23만5000여 명에서 2002년에는 300만명을 넘어섰다. 인구 1만명당 대학생수는 1975년 66.7명에서 지난해 623.2명으로 10배 가까이 늘었다. 매년 50만이 넘는 대학졸업자(전문대, 교육대, 일반대 포함)가 사회로 쏟아져 나오는 실정이다. 박씨가 대학생이던 시절 전체 대학생 수의 2배를 넘는 규모다. 최근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체감 청년실업률’이 15.4%에 달한다. 지난해 통계청이 집계한 청년실업률은 7.9%인데, 이는 청년층 경제활동인구(463만4000명) 중 실업자(36만4000명)만 감안한 수치고, ‘체감 청년실업률’은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되는 취업준비자까지 실업자에 포함시켜 계산한 것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구직 포기자까지 합하면 청년실업자(15~29세)가 100만명이 넘고, 청년실업률은 19.5%까지 올라간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높은 청년실업률이 장기간 지속되는 원인으로 ‘노동시장의 수급 불일치’를 지목한다. ‘산업 고도화에 따라 기업의 고용 유발력이 축소(노동 수요 감소)되고 있는 한편, 대학 졸업자가 꾸준히 증가(노동 공급 증대)하는 학력 인플레이션이 전반적으로 직업에 대한 기대 수준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 한 마디로 일자리가 새로 만들어질 가능성은 작아지는데, 구직자의 눈높이는 점점 높아진다는 얘기다. 현대경제연구원 표한형 연구위원은 “학력 인플레도 문제지만, 산업 전반에서 자본집약도가 높아짐에 따라 ‘고용 없는 성장’이 지속되는 것이 높은 청년실업률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보고서에 따르면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가 줄어들고 있다. ‘괜찮은 일자리’란 ‘정규직이고, 평균임금의 1.5배 이상을 받으며 주당 근로시간이 18~50시간인 일자리’를 뜻하는데, 2002년 71만4000여 개에서 2005년 67만2000여 개로 감소했다.
정부 창출 일자리, 오히려 毒 지난해 한국개발연구원(KDI)이 펴낸 ‘양극화 극복과 사회통합을 위한 사회경제정책 제안’ 보고서도 ‘양질의 일자리 감소’를 사회 문제로 지적한 바 있다. KDI는 ‘노동부 고용보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분석한 결과, 30대 대기업 집단 소속 계열사와 공기업, 금융회사 등의 종업원 수가 1997년 157만9000명에서 2004년 130만5000명으로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이들 기업의 종업원 수는 외환위기를 거치며 134만3000명(1999년)으로 급감한 뒤 2002년 124만5000명까지 감소세를 유지하다 2003년 127만1000명, 2004년 130만5000명 등 회복세로 돌아섰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KDI 김용성 연구위원은 “고임금 일자리는 대체로 제조업, 특히 대기업에 많은데, 제조업 분야의 대기업들이 생산기지를 해외로 옮기는 추세라 제조업 분야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는다”며 “서비스 분야에서 일자리를 창출해 이를 보완해야 하는데, 서비스 분야 생산성이 OECD 국가 중 최저 수준에 머물러 있어 20~30대 고학력자의 노동시장 진입이 상당히 어려운 상태”라고 분석했다. 김 연구위원은 “20~30대의 실업이 장기화하면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외국의 경우 실업자가 저학력층에 몰려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고학력 실업률이 월등히 높은 데다 이들이 장기적으로 사회에 진입조차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아예 구직을 포기하고 비경제활동인구로 빠져버릴 것”을 염려하는 것. 그렇다고 ‘정부의 직접적인 일자리 창출’이 해결책이 되는 건 아니다. 김 연구위원은 “정부가 창출하는 일자리가 대부분 단기적인데다 민간기업에서 요구하는 역량 획득에 전혀 도움이 안 돼 오히려 취업에 약점으로 작용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공공근로 경험이 오히려 ‘실업자 경력’을 확실하게 부각한다는 이유로 구직자들이 기피한다는 것. 현대경제연구원은 청년실업 대책으로 “산업수요와 성장산업의 소요인력을 고려한 종합적 직업·대학교육 체계 개편, 지속가능한 일자리에 재정지원 집중, 일자리 창출 동력 강화를 위한 투자 확대, 중소기업에 취업하는 고학력 청년층에 인센티브시스템 확립 등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3명 중 1명은 대졸자 1980년엔 대졸자가 25세 이상 인구 전체의 7.7%에 불과했다. 하지만 2005년엔 31.4%가 대졸자다. 25세 이상 성인 3명이 모이면, 그중 1명은 대졸자인 셈이다. ‘대학을 나오면 안정된 직장을 얻을 수 있다’는 건 옛말이 되어버렸다. ‘대학졸업장’이 아무런 프리미엄 효과를 내지 못하니 취업희망자들은 새로운 프리미엄을 강구한다. 그래서 구직자들 사이엔 취업 ‘5종세트’ ‘7종세트’란 말이 나돈다. 명문대 졸업장, 외국어 성적, 해외 경험, 기업체 인턴십, 각종 자격증, 봉사활동…. 취업 준비를 위해 졸업을 미루고 휴학 중인 서모(26·남)씨는 “여기에 ‘능력 있는 부모’를 더하면 최상의 ‘스펙’이 된다”고 말한다.
‘스펙’이란 명세서란 뜻의 specification을 대졸 구직자들이 줄여 쓰는 말로, 입사지원서에 기입하는 내용을 가리킨다. 부모의 학력이나 경제력이 자녀의 학교성적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다는 얘기가 공공연한데다, 어학연수나 각종 자격증 획득을 위해선 등록금 외에 추가 비용이 들고, 그 비용으로 ‘스펙’이 차별화되는 데서 나온 얘기다. 이력서 및 자기소개서를 ‘환상적으로’ 만들어주는 업체며 ‘취업 족집게 과외’도 성행한다고 하니 부모의 경제력이 취업의 지름길이라 생각될 수도 있겠다. 기자가 취재 중에 만난 10여 명의 미취업 대졸자 및 대졸예정자 중 1명을 제외하고 모두 6개월 이상의 해외 어학연수 경험이 있었다. 연간 등록금이 사립대 인문계의 경우 1000만원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해외 어학연수까지 대학생이 으레 거쳐야 할 과정으로 자리잡아 대학생 자녀를 둔 부모는 허리가 휠 지경이다. 허리가 휠 망정 부모가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여력이 있으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대학등록금에 어학연수비용까지 감당하느라 사회에 진입하기도 전에 채무자 신세가 되는 젊은이도 적잖다. 수도권의 한 사립대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한 김모(28)씨는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졸업 전 네 학기 등록금을 학자금 대출로 충당했다. 두 학기는 생활자금까지 대출받아 총 1500만원 가까운 빚을 진 상태로 졸업했다. 이게 다가 아니다. 꼭 취업을 해야 하는 김씨는 ‘in 서울’ 대학이 아니라는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 6학기를 마치고 멕시코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1년 학비와 체류비 1000만원은 친척에게서 빌렸다.
실제 임금보다 높은 유보임금 2003년에 대학을 졸업해 취업전선에 나선 김씨는 암담한 현실과 맞닥뜨렸다. 김씨는 해외영업 및 마케팅 업무에 관심을 가졌으나 스페인어 전공자를 원하는 기업이 드물뿐더러 있다 해도 ‘경영학 전공’ ‘토익 고득점’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결국 한국무역협회의 무역 실무 1년 과정과 영어학원 토익반에 등록했다. 그러던 중 ‘보험용’으로 지원한 소규모 무역회사에서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김씨는 한참을 고민했다. “고작 영세한 무역회사에 들어가려고 그렇게 무리하게 돈을 들여 공부한 건 아닌데, 당장 학자금 대출 이자에 카드대금을 내야 하고, 친척들 보기도 민망해 결국 첫 출근을 했어요. 곧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하자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막상 취직하고 나니 다른 데 또 원서내고 면접 보러 다닐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그러다보니 벌써 4년이나 다녔어요. 이젠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요. 요즘은 중소기업에 다닌 경력이 별 인정을 못 받는다고 해요.” KDI 김용성 연구위원에 따르면 “1990년대 대학설립이 자유화하면서 우리나라 대학 진학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최고 수준이 됐고, 대졸자들은 ‘대학을 나왔으니 이 정도 이상은 받아야 한다’는 유보임금(reservation wage)을 기업이 생각하는 것보다 높게 잡는 경향이 있다.” 이런 막연한 기대 수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기업엔 아예 지원하지 않거나 설사 지원해 합격하더라도 입사를 하지 않으니 구직 기간이 길어진다. 최근 ‘동아일보’와 취업정보업체 인쿠르트가 공동으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대졸 구직자 이력서 111만5000여 건을 분석한 결과에서도 대졸구직자의 ‘희망 연봉’은 실제 대졸 초임보다 많고, 꾸준히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 1799만원, 2004년 1878만원, 2005년 2041만원, 2006년 2137만원. 반면 연봉 전문 사이트 오픈샐러리가 조사한 국내 전체 기업의 대졸 초임 평균은 2003년 1760만원에서 2006년 1897만원으로 오르는 데 그쳤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소규모 무역회사에 다니는 김씨 역시 ‘일단 취업이 되면 고소득을 보장받을 것’이라고 기대했기에 형편이 안 되는데도 어학연수를 다녀온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3000만원, 4000만원 하는 연봉이 제가 받게 될 액수인 줄 알았어요. 그게 일부 금융회사와 소수 대기업에 국한되는 얘기란 걸 뒤늦게 알았죠. 아직도 학자금 대출금을 갚고 있는 저를 보면서 어머니가 그러세요. ‘난 너희 남매 대학만 졸업하면 우리 집 형편이 금세 필 줄 알았다’고.”
김용성 연구위원은 “유보임금을 낮춰 중소기업이나 서비스업에 취업하더라도 사회경제적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 우리 경제가 그렇지 않은 상황에 있다”고 분석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근로조건과 임금 격차가 심해진데다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의 이직이 어려워지면서 젊은층이 좌절을 겪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이러한 노동시장의 경직성은 고학력 청년층의 구직기간을 늘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기업을 비롯한 고임금 일자리를 고집하고, 소득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긴 시간 취업준비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괜찮은 일자리’는 극히 한정되어 있다. 올 초 전국경제인연합이 2005년 매출액 기준 300대 기업을 대상으로 ‘고용동향 및 채용계획’을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기업 201개사 중 140개 기업만이 채용계획인원을 밝혔고, 61개사는 올해 채용계획이 없거나 미정이라고 응답했다. 주요 기업 140개사의 올해 신규 고용계획 인원은 3만4900명. 경력 채용까지 포함한 숫자라 실제 신입채용 규모는 훨씬 작다. 산업별로는 전기전자업종의 신규 고용계획 인원이 1만5397명으로 전체의 44.1%를 차지했고, 음식료 및 자동차, 조선 순으로 조사됐다. 주요 기업들이 밝힌 채용계획 중 눈에 띄는 점은 전체 3만4900명 중 2만595명(59%)을 매출액 순위 50대 기업에서 뽑는다는 점이다. 지난해 지방의 4년제 대학을 졸업한 김모(25)씨는 “취업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서울의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1, 2년 만에 거의 다 취업을 한다”며 “지방대 출신이 파고들 틈이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대입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제야 알겠다”고도 했다. 대기업이나 고임금 일자리 창출이 저조한 상황에서 적은 일자리마저 최상의 ‘스펙’이 몰리는 기업들에 집중되어 있다보니 ‘청년실업 대란’ 속에서도 일부 대학 출신자는 2~3군데에 동시 합격하고, 지방대 출신 구직자는 면접 한 번 못 보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유학과 공무원 시험 중 택일 서강대 중국문화학과 4학년 정모(24)씨는 해외 어학연수로 갈고닦은 유창한 외국어 실력에 우수한 학부 성적으로 무장해도 취업문을 통과하지 못한 청년 백수가 수두룩한 상황을 보고 일찌감치 진로를 바꿔 취업에 성공한 경우다. 내년 2월 졸업 예정인 정씨는 지난해 말 국가공무원 7급 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정씨는 대학 3학년 때인 2004년 8월에 휴학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최근 공무원 또는 공기업 취업에 ‘올인’하는 ‘공시족(公試族)’이 늘고 있는 상황에 비춰보면 경쟁이 극심해지기 직전에 한 발 앞서 준비한 셈이다. 부모의 현실적인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5학기 때 부모님이 먼저 권유하셨어요. ‘요즘은 유학도 다녀오고, 실력이 출중해야 취업할 수 있다는데, 어학연수 1년 다녀올 비용으로 2년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 어떻겠냐’고요. 공무원집단이 ‘철밥통’이다 ‘우물 안 개구리다’ 하며 비판받지만, 생각해보니 열심히 하면 문화관광이나 통상 쪽에서 전공을 살릴 수 있겠더라고요. 나중에 공부를 더 할 기회도 있고.” 경남 마산 출신인 정씨는 휴학 후에도 서울 신촌 원룸에서 자취를 계속하며 시험을 준비했다. 용돈을 아무리 아껴 써도 집세에 관리비, 생활비까지 더하면 한 달에 50만원으로 부족했다. 학원비며 교재비는 별도다. 정씨는 “신림동에 가면 지방에서 올라와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 많다”며 “학원에 등록할 돈이 없어 도강(盜講)하는 사람도 적잖다”고 말한다. 시험 정보며 사교육인프라 면에서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현격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서울로 몰리는데,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궁핍하게 생활하는 청년층이 많다고 한다. “부모님 말씀이 저 대학 보내는 데 1억원은 족히 들었대요. 지난해 가을학기에 복학하면서부터는 등록금 전액을 학자금 대출 받아 냈어요. 벌써 1000만원 가까운 빚을 졌답니다. 무거운 짐이에요.”
“누릴 건 누리고 살아야지” 하지만 정씨는 직장생활을 시작하더라도 저축에만 매달릴 생각은 아니다. 전시, 공연 등 문화생활에 대한 욕구를 유감없이 충족시키고 싶은 바람이 있다. “지금은 용돈이 적으니까 제 돈으로 표를 사는 건 사실 한 달에 한 번도 벅차고, 주로 이벤트에 응모해 당첨되거나 초대권을 가진 친구가 있을 때 공연을 관람해요. 좋은 옷, 명품 가방 같은 건 제 분수에 안 맞다고 생각하지만 문화생활만은 기회 닿는 대로 최대한 누리고 싶어요. 엄마는 나중에 월급 받으면 절반을 뚝 떼서 저금하라고 하시는데, 전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축하느라 지금 누릴 수 있는 걸 못 누리는 건 좀 그래요. 적금 비율을 좀 줄이더라도 적립식펀드 등에 넣어 효율적으로 재테크를 하면 되잖아요.”
지방대학 교수인 이모(64)씨는 1999년 대기업에서 퇴직한 후 재취업에 성공한 경우다. 비슷한 시기에 직장에서 퇴직한 친구들은 “지금껏 현직에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부러워하지만, 이씨는 벌써 내년으로 다가온 정년퇴직 후를 걱정하고 있다. 이씨는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뒀다. 군대 간 막내아들(25)은 아직 대학 2학기를 남겨뒀고, 두 딸은 서울의 명문대를 졸업했다. 첫째딸(31)과 둘째딸(29)은 대학원까지 다녔다. 그러나 두 딸 모두 가정경제엔 별 보탬이 안 되는 상황이다. 첫째딸은 줄곧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최근 박사과정을 밟기로 마음먹었고, 둘째딸은 지난해 일간지 기자가 됐지만 여전히 꼬박꼬박 용돈을 타 쓰고 있다. 둘째딸이 성남시에서 출퇴근하기 힘들다고 해 지난해 전세로 마련해준 24평형 아파트 관리비며 각종 공과금도 이씨의 통장에서 빠져나간다. “둘째 말이 세금 떼고 통장에 들어오는 월급이 100만원 겨우 넘는데요. 그런데 사회 초년생이 돈 쓸 일이 좀 많나요. 옷 사고, 구두 사고, 가방 사고, 여자들 화장품 값은 또 왜 그리 비싼지. 아내가 딸에게 준 제 명의의 신용카드를 여태 회수하지 못하고 있더라고요. 요새 젊은 애들은 약아서 제 명의의 신용카드가 있을 텐데도 비싼 거 살 땐 꼭 제 카드를 써요. 지금이야 제가 버니까 그럭저럭 버티지만 앞으로가 걱정이죠.” 사회진입장벽이 높은 것과 더불어 ‘돈 쓸 데가 많다’는 것 또한 20~30대를 ‘빈털터리’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기성세대는 “버는 돈 없이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참지 못하고, 모으기보다 쓰는 걸 우선한다”며 젊은 세대를 한심스러워하지만 정작 괴로운 건 ‘쓸 데는 많은데 돈이 없는 그들’이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는 “우리나라 20~30대를 규정하는 가장 적합한 코드는 ‘소비’”라고 말한다. “20~30대는 이전 세대와 분명히 달라요. 국민소득 1만달러가 넘어선 시대에 태어나 놀이나 유희를 소비로 대체했죠. 어린 시절 또래 아이들과 모여 동네방네 뛰어다니며 놀기보다 전자오락기, 텔레비전, 워크맨을 이용해 혼자 노는 걸 즐겼고, 자라면서 과외나 학원으로 내몰렸고요. 지극히 개인적인 세대로 자라나 성인이 된 다음에도 백화점 구경하고, 인터넷 쇼핑하는 게 그들의 놀이문화죠. 브랜드에 대한 지식과 이해(brand literacy)가 부모세대보다 월등히 높아서 어른들이 모르는 브랜드를 많이 알고, 문화적 정서를 광고로 습득한 세대예요. 그러니 소비에 대한 지식도 많고 열정도 강하죠.” 실제로 얼마 전 부모로부터 독립해 혼자 원룸에서 살고 있는 정모(28)씨는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돈을 모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휴일에 갈 만한 곳은 백화점뿐이고, 잡지에선 매달 새로운 트렌드와 신제품을 알려주고, 인터넷 포털사이트 한쪽에선 쇼핑몰 ‘특가 상품’이 한 번 와서 봐달라며 깜빡거리니 욕구를 억제할 수 있겠냐”는 얘기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국민소득 수준이 높지 않았을뿐더러 사회적으로 절약과 저축을 강조하는 캠페인이 이어졌다.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외제품 소비는 생각 없는 사람들의 사치와 허영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세상은 아주 빠르게 변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생활수준이 급격히 향상된 데 이어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와 1990년대 중반 무역장벽 완화는 소비 범위를 국제적으로 넓혀놓았다. 근검절약을 강조하던 정부는 “소비가 경제를 살린다”며 돈 쓰는 걸 부추겼다.
‘부자 되세요’ 코드 대학생 해외 어학연수 바람도 20~30대의 ‘수준 높은’ 소비를 이끌었다. 해외 유학 경험자는 자신이 머물던 나라에서는 한창 인기지만 아직 한국엔 들어오지 않은 브랜드 제품을 쓰고, 그 나라의 음식을 찾아먹는 것으로 유학 경험을 과시한다. 미국을 본거지로 한 베트남 음식 전문점 체인 ‘포호아’가 강남에 1호점을 낸 게 1998년이고, 이듬해 이대 앞에 ‘스타벅스’가 생겼다. 외환위기로 주춤했던 해외 어학연수 기류가 다시 살아날 즈음 속속 국내에 진출한 이들 해외 브랜드는 유학 경험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성장했다. 기자는 2004년 ‘크리스피크림 도넛’이 소공동 롯데백화점 지하에 입점했을 때 미국 뉴욕에 어학연수를 다녀온 경험이 있는 동료 기자가 “미국에 있어본 사람은 이 맛을 잊지 못한다”며 길게 줄 선 사람들 대열에 ‘당당하게’ 합류하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유모(30·여)씨는 3년째 교제 중인 남자가 있지만 당장 결혼할 생각은 없다. “둘 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각자 번 돈으로 결혼해 생활해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계산이 안 나온다”는 게 이유다. “대학졸업 후 줄곧 직장생활을 했는데, 남은 돈이 없어요.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 전세금이 전부인데, 그나마 4000만원 중 2000만원은 부모님이 보태주신 거고요. 그렇다고 사치스럽게 생활한 건 아니에요. 카드 빚 없이 연봉 2800만원으로 예쁜 옷 사 입고, 여름휴가 땐 동남아라도 다녀오고, 면세점에서 갖고 싶던 가방 사고, 친구들과 만나면 맛있는 음식에 와인 한 잔 곁들일 수 있으면 알뜰한 거죠(웃음). 다만 모아둔 돈이 없어 집을 못 산다는 게 흠인데, 6년간 악착같이 모았으면 과연 집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도 않잖아요. 굳이 먼 미래를 내다보지 않는 한,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김난도 교수는 “정치적 이슈가 대학가를 지배할 때는 소비에 관심이 있어도 드러내기 껄끄러웠지만, 사회 전반이 소비적으로 바뀐 다음, 특히 외환위기 이후엔 ‘부자 되세요’가 전국민의 열망이자 코드로 자리잡았다”고 말한다.
생필품까지 ‘명품 바람’ “‘소비의 평등화’란 허울을 쓰고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사치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만연하게”(김난도 지음, ‘럭셔리 코리아’) 된 것도 20~30대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사치품이 외제차, 고급 예물, 양주 등에 국한됐을 때는 자신이 번 돈 안에서 알뜰하게 사는 게 미덕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명품 바람’이 생필품에까지 번지면서 ‘비싼 게 좋은 것’이라는 분위기에, ‘비싸도 좋은 것’을 고집해야 ‘센스 있고 감각 있다’고 평가받는 풍토다. 대형 마트 식품 매장에만 가 보아도 한 종류의 채소가 그냥 채소와 무농약 채소, 유기농 채소로 나뉘어 있고, 분유 코너 또한 일반 분유, 고급 분유, 유기농 분유로 구분해 진열돼 있다. 유기농 분유 값은 같은 용량의 일반 분유 값의 3배가 넘는다. 마트에서 함께 장을 보던 30대 초반의 주부 두 사람은 “그냥 채소에 일반 분유 사가면 계모인 줄 알겠다”며 유기농 분유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네 살 난 딸을 둔 맞벌이 주부 최모(37)씨는 아이 놀이방비와 도우미 아주머니 월급을 주고 나면, 자신의 월급에선 남는 게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유아용품만은 최고를 쓰지 않을 수 없다”며 “전업주부인 친구 중엔 육아비용 때문에 친정에 손 벌리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 교사인 조모(34·남)씨는 요즘 고민이 많다. 2년 전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처가로 들어갔는데, 설 무렵 장모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하는 바람에 집안이 엉망이 된 것. 10년 전 혼자 된 장모는 쓰러지기 전까지 작은 공장에 다니며 생활비를 벌었다. “장모님이 그 연세가 되도록 바깥일을 계속 하는 게 마음이 쓰이긴 했어도 집안에 큰 문제는 없어보였는데, 막상 장모님이 쓰러지시니까 집안이 지뢰밭처럼 문제투성이더라고요. 대학 졸업하자마자 결혼해 직장생활을 해본 적 없는 아내가 집에서 아이를 돌보면서 인터넷 쇼핑을 자주 했나 봐요. 집에 아이 옷, 장난감, 갖가지 교구와 책들이 나뒹구는데 그런 것들이 그렇게 비싼 건지 몰랐어요. 이번에 보니 얼마 안 되지만 전에 살던 집 전세금도 다 써버리고, 매달 빠져나가는 할부금이 200만원에 가깝더라고요. 지금껏 장모님한테 생활비 한푼 안 드리고 살았는데 당장 입원비는커녕 생활비도 없으니…장모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현금 100만원, 카드 100만원
탤런트 김정은이 “부자 되세요”를 외쳐 화제가 된 광고는 알다시피 신용카드사 광고다. 신용카드는 부자가 아닌 사람도 부자처럼 소비할 수 있도록 소비 패러다임을 바꿔놓았고, 그 패러다임의 전환을 기꺼이 온몸으로 받아들인 세대가 20~30대다. 김난도 교수의 설명이다. “신용카드는 지급이 편리하다는 것 외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어요. 과거엔 100만원짜리 물건을 사려면 100만원을 모아야 했는데, 요즘은 일단 ‘긁고’ 나중에 값을 지급합니다. 일단 소비하고, 나중에 생각하는 거죠.”
100만원짜리 물건에 욕심이 생겨 악착같이 100만원을 모았다고 해도 막상 현금 100만원을 손에 들면 선뜻 돈을 써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달라진다. 신용카드로 결제를 하면 돈의 가치가 모호해질 뿐만 아니라, ‘소비의 기억’이 잘 누적되지 않는다. 그러니 당장 현금이 없어도 소비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카드대금 명세서가 나오기 전까지는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계산하지 못한다. 직장생활 3년차에 접어든 신모(29)씨가 술값, 밥값 외에 별다른 지출이 없는데도 매달 카드대금으로 나가는 돈이 생각보다 많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성세대는 소득이 생기면 저축부터 하고 남은 돈으로 소비를 했던 반면, 20~30대는 소득이 완성되기 전부터 지출액을 쌓아놓는다. 우선순위도 다르다. 과거엔 ‘집을 사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든 욕구 충족을 ‘내 집 마련 뒤’로 미뤘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다. “서른두세 살 쯤에 결혼했으면 한다”는 신씨도 “내 집 마련을 미루고 자동차를 먼저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내 집 마련을 위해 다른 욕구를 포기하기보다 내 집 마련 시기를 미루거나 전세로 시작하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신씨가 생각하는 아파트 전세금은 얼마쯤 될까. 기자가 기억하는 선에서 “구로구의 24평형이 1억3500만원, 마포구의 같은 평수는 1억9000만~2억5000만원, 용산구의 32평형은 1억9000만원 정도”라고 하니 신씨의 눈이 동그래진다. 연봉을 한푼도 안 쓰고 5년 넘게 모아도 마련하기 어려운 금액이기 때문이다. 20~30대를 경제적으로 괴롭히는 또 하나의 복병이 집값이다. 참여정부 최대 골칫거리 부동산문제는 특히 20~30대를 절망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서울대 석사 출신의 대기업 대리 이모(31·여)씨는 ‘5월의 신부’가 된다. 상대는 지난해 친구 소개로 만난 4년 연상의 직장인. 똑같이 직장생활 6년차에 접어든 두 사람은 각자 모은 돈을 합쳐 마포의 20평형대 아파트를 매입했다. 동료들은 “‘내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니 얼마나 좋으냐”며 부러워하지만 정작 이씨는 “빚더미 위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며 심란해 한다. 이씨와 예비신랑이 직장생활 만 5년 동안 모은 돈은 1억원이 넘는다. 그중 결혼식 및 혼수비용을 제하고 남은 8000만원이 내 집 마련 비용이다. “명품 가방 하나 사지 않고 알뜰하게 모은 거예요. 매년 여름휴가 때 해외여행 다녀온 게 사치라면 사칠까. 남편 될 사람도 입사 초기에 중고 자동차를 산 것 말고는 차곡차곡 모은 편이고요. 막상 집을 구하러 다녀보니 8000만원이 턱없이 적은 돈이더라고요. 결국 20년 넘은 아파트를 1억5000만원 대출받고 샀어요.”
빚더미 위의 ‘스위트홈’ 가진 돈의 두 배 가까운 빚을 져가며 굳이 집을 사야 할까. 이씨는 “남의 집을 전전하기 싫다”는 일반적인 이유 외에 “집을 손수 예쁘게 꾸미고 싶다” “지금 무리해서 사지 않으면 평생 집을 못 살 것 같다”는 두 가지 이유를 더 댔다. 최근 33평형 아파트 전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권모(37)씨도 “대출금 이자를 내는 것보다는 전세가 낫다고 생각하지만, 아내가 ‘내 집이 아니라 집을 마음대로 꾸밀 수 없다’고 얘기할 땐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젊은이들에겐 ‘내 집’이냐 아니냐에서 더 나아가 집을 어떻게 꾸미고 사느냐도 중요한 관심사다. 이 때문에 요즘은 신혼집을 마련하는 경우 집값에 인테리어 비용 1000만~2000만원을 더 보태야 하는 추세다. 결혼 적령기로 접어든 자식을 둔 부모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소 판 돈으로 대학을 다녔을망정 취업해 열심히 모으면 수년 내에 내 집 마련이 가능하던 시절은 간 데 없고, 평생을 저축해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집값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서울대 졸업과 동시에 언론사에 입사한 김모(52)씨는 1988년 목동의 27평 아파트를 2020만원에 분양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월급이 80만~90만원(상여금 별도)이었고, 초등학교 입학 전인 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김씨의 부인 이모(52)씨는 “(남편의 소득 중) 상여금 전액과 월급의 일부를 떼어 모으면 1년에 500만~600만원은 모았다”며 “그때만 해도 월급쟁이가 허리띠를 졸라매면 몇 년 안에 내 집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 목동의 27평형 아파트 매매가는 7억~8억원(스피드뱅크 실 구매가, 3월9일 현재). 대학 졸업을 앞둔 아들을 둔 이씨는 “우리 아들이 월급 모아서 집을 살 수 있겠냐”며 “(결혼할 경우) 결혼식을 간소하게 하고, 양가에서 1억원씩 내놓아 전세를 얻으면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또 “집값이 턱없이 오르는 바람에 젊은 사람들이 아예 돈 모으기를 포기하고 버는 족족 소비해버리는 경향이 있다”며 걱정스러워했다. LG경제연구원 오문석 상무 표현대로라면 ‘실망소비’다. “주택가격이 급증한 탓에 내 집 마련 가능성이 없다고 전망한 20~30대가 실망스러운 마음에 소비하는 경향”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집값 급등’이 20~30대에게 미친 여파는 ‘실망소비’ 수준을 넘어서 사회 구성원 간에 깊은 골을 만들었고, 일에 대한 의욕을 저하시킨 것은 물론 직업관까지 바꿔놓았다.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홍모씨(35·여)의 얘기다.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면 으레 부동산 얘기가 나와요. 얼마 전 대학 동기 한 명이 2003년 1억8000만원에 분양받은 33평형 아파트가 요즘 6억원을 넘는다고 자랑하는데, 비슷한 시기에 1억7000만원으로 전세를 얻은 제 자신이 정말 바보 같더라고요. 은행 빚 내기 싫어서 전세 살았는데… 이제 그 친구랑 저는 ‘계층’이 완전히 달라졌죠.”
돈으로 나를 드러낸다 소위 최고의 직장으로 손꼽히는 삼성전자 신입사원도 ‘요즘 같은 추세라면 내 집 마련은 이루기 힘든 꿈’이라고 생각한다. 올 초 삼성전자에 입사한 S(27)씨는 “DTI(총부채상환비율) 적용 이후 내 집 마련은 물 건너갔다”고 말한다. “재테크는 남이 연 5~7%의 소득을 올릴 때 10~15%를 번다는 의미잖아요. 재테크를 잘해봤자 지금으로선 제 능력으로 집을 갖는다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죠. 얼마 전에 본 4컷 만화가 요즘 젊은 세대의 실정을 아주 잘 보여주더라고요. 한 명은 우수인재로 연봉 3500만원 받는 직장에 취업해 1년 만에 2000만원을 모았고, 다른 한 명은 부모 잘 만나 중소기업에 취직하자마자 3억원짜리 아파트를 선물 받았는데 1년 만에 1억원이 올랐다는 얘기였어요. 그게 현실이에요. 열심히 살려는 사람의 의지가 꺾이죠.” 서울대 김난도 교수는 우리나라 20~30대가 “소비에 대한 열망과 소비 가능한 자원 사이의 격차가 큰 세대이며, 다른 세대보다 결핍과 불만에 훨씬 민감하다”고 말한다. 부모세대에 비해 어린 시절을 풍요롭게 보냈지만, 외환위기 당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는 냉혹한 현실을 목격하며 양극단을 체험한 이들은 성인이 된 뒤엔 ‘로또’와 ‘부동산 광풍’이라는 인생역전의 기회(?)와 마주했다. 부모세대가 전쟁과 산업화, 민주화 시대에 살며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재했다면, 20~30대는 대체로 자기 자신과 ‘돈’에 집중한다. 다만 돈을 모으는 것보다 돈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목표를 둔다. 그러나 김난도 교수는 “20~30대의 소비성향이 기성세대가 염려하는 것처럼 쓸 줄만 알고 벌 줄은 몰라 생산성을 저해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소비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일할 겁니다. 갖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을 획득하기 위해 투잡(two jobs), 스리잡(three jobs)도 감수할 겁니다. 물질문화에 노출될수록 삶이 더 각박해지죠. 젊은이들이 고소득 직종에 관심이 많고 직업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연봉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죠.” 소비 욕구가 일할 동기를 제공하면 다행이지만, 직업 선택의 이유가 단지 ‘돈’이라면 청년실업 장기화 문제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유보임금에 밑도는 직장엔 입사를 포기하고, 재수 삼수를 하는 한이 있어도 ‘높은 연봉, 안정된 정년 보장’이 트레이드마크인 공기업 입사를 고집하며, 대학 졸업 후에 다시 치·의대 대학원에 진학하는 현상 등이 그 부산물이다.
“똑똑한 애들은 다 의대 갔는데…” S씨는 인재들이 의대와 고시로 몰리는 현상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라며 걱정스러워했다. “똑똑하다는 애들은 대부분 인문계는 고시, 자연계는 의대로 몰리는데, 우리나라의 법률시장이나 의술은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 않으니 큰일이죠.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외고열풍이 불기 시작했는데, 이런 추세라면 앞으론 유치원 때부터 입시준비에 시달려야 할 거예요.” S씨의 말은 ‘십장생’이란 신조어를 떠올린다. ‘십대들도 장차 백수가 될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비관적인 의미다. 실제로 경제전문가도 비슷한 걱정을 한다. LG경제연구원 오문석 상무는 “고령화시대에 부가가치를 창출해 노령인구를 간접 부양해야 할 20~30대의 경제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것은, 지금의 10대가 노동시장에 진입해야 할 시기에 엄청난 사회·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기성세대의 경제활동으로 유지되는 화로가 어느 순간 꺼져버릴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이러한 위기를 피하기 위해선 “서비스산업에서 다양한 직업군을 창출하는 등 직업 스펙트럼이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요즘 젊은이들이 똑똑하긴 하나, 계산적이고 안정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평가한다. 그는 “우리가 젊었을 때처럼 사회의 앞날을 걱정하던 모습이나 개척정신, 모험심은 찾아보기 힘들다”며 아쉬워했다. 20~30대의 소비성향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김난도 교수도 “학생 대부분의 꿈이 돈 많이 벌고 안정된 직장을 갖는 것으로 귀결되는 오늘날의 세태는 분명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지금 속수무책인 상황이에요. 물질주의는 숙명이지만 과시욕에 치중한 지금의 소비 행태는 분명 비정상적입니다. 소비 외에 젊은이들이 즐길 만한 도락(道樂)이 없는 것도 문제지요. 과거엔 젊은이들이 학교, 장래희망, 가치관 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했는데, 요즘은 소비욕망이 곧 정체성이에요.” 1970, 80년대까지만 해도 사상지나 문예지, 시사월간지가 젊은이들의 지적,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자극했다. 그러나 요새 젊은이들은 패션·명품 잡지와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누가 얼마를 벌고, 무슨 옷을 입고, 무엇을 먹는지, 그리고 어떤 집에 사는지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다. 세상이 그렇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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