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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이모저모/다큐멘터리 및

위대한 대륙의 지배자, 고조선

by 현상아 2007. 7. 30.
위대한 대륙의 지배자, 고조선

고조선은 언제 건국되었나?
 외국에 나가 우리역사를 소개한 책들을 보면 한국역사의 상한선이 전부 2천년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이것이 전부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쓴 책을 보고 그렇게 소개했다는 것이죠.
 
 우리 국사 교과서를 보면, 앞에 고대사 부분이 상당히 애매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일연의 『삼국유사』에 따르면 BCE 2333년에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한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건국했다’라고 끝맺으면 그것은 교과서를 쓰는 사람의 인식이 반영된 것인데, ‘∼했다고 한다’라는 것은 『삼국유사』에 그렇게 쓰여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이 국사교과서를 저술한 사람들이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 라고 믿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또 “청동기시대에 국가가 수립된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면 청동기시대라야 비로소 국가가 수립되느냐? 이집트 고왕국이나 잉카문명, 마야문명들은 청동기시대가 아닙니다. 석기시대입니다. 그런데 이 문명들을 국가가 아니라고 하면 세계학계에서 망신당하죠. 청동기시대 때 국가가 수립된다고 명기한 교과서는 한국 교과서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청동기시대는 한반도에서는 BCE 10세기, 만주에서는 BCE 13세기∼15세기에 시작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역사에서 국가의 시작은 아무리 빨라도 한반도의 경우 BCE 10세기 이상으로 못 올라가죠? 만주를 기준으로 해도 BCE 15세기 이상 못 올라갑니다. 그렇다면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말한 BCE 24세기에 단군이 건국했다는 이야기와 비교해 보면, 900년 내지 1300년 이상의 역사시간이 없어지게 됩니다.
 
 
단군조선을 인정하지 않는 국사교과서
 고조선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900년 내지 1300년 사이의 빈 공간에 속하는 조선이 바로 단군조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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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우리 국사교과서에서는 BCE 10세기 경인 위만조선 때 고조선이 수립됐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나머지 단군조선은 ‘일연의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라는 식으로 모호하게 쓸 뿐 실제로는 청동기 운운하면서 인정을 안 하는 것입니다.
 
 단군조선이 없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부터 우리 역사가 시작됩니다. 기자나 위만도, 그 출신지역이 본래 동이족들이 죽 살던 곳이기 때문에 새로운 문제를 도출할 수 있지만 그건 논외로 치더라도, 그렇게 되면 결국 중국에서 말하는 동북공정이 정당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증거1. 동이족 문화인 홍산문화의 청동기 유적은 BCE 24세기 유물
 현 주류 사학계에서 청동기 유물로 고조선 역사를 규정하고 있으니, 청동기 시대를 가지고 고조선 역사를 분석해 봅시다.
 
 내몽고 적봉시에 가면 북쪽에 홍산(紅山)이라는 붉은 산이 있습니다. 그 일대에서 많은 유적 유물들이 나오는데, 그걸 통칭해서 홍산문화라고 부릅니다. 중국 측 자료들을 보면 홍산문화를 중국문화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 중국 사람들은 자기네 문화가 아니라는 걸 잘 압니다. 홍산문화는 동이족의 문화죠.
 
 홍산문화 중에 아주 중요한 유적 중 하나가 우하량 유적입니다. 우하량 유적에서 여신탈이나 각종 옥(玉) 등 상당히 많은 유물들이 나왔습니다. 그 지역 무덤 형태도 고구려 시대까지의 우리 전통 무덤 형식과 같습니다.
 
 재작년에 그쪽 지역 답사를 가봤더니 우하량 유적 한가운데를 뻥 뚫어서 4차선 도로를 놓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자기네 문화라고 해놓고도, 홍산문화를 계속 연구해서 그것이 동이문화라는 게 밝혀지면 동북공정에 상당히 불리하다는 걸 알고 의도적으로 파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산문화로 표현되는 중국, 만주 그리고 내몽고 지역의 문화들은 고조선의 전사(前史)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발굴된 청동기를 조사해보면, 가장 빠른 시기 것을 제외하고 중간시기 것만 놓고 봐도 BCE 24세기 때 유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조사하면 할수록 그 연대는 더 올라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재 조사된 것만 기준으로 봐도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이야기한 BCE 24세기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홍산문화는 중국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우리 민족의 문화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한국 고대사를 바라보는 인식의 폭이 상당히 넓어지게 됩니다.
 
 
 
증거2. 동이족 치우천황의 금속무기
 중국의 역사왜곡의 또 하나 예가 ‘치우’입니다. 중국 하북성 탁록현에 ‘귀근원(歸根園)’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삼조당(三祖堂)’이 있는데, 중화민족의 세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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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농씨와 중국의 시조라고 하는 황제, 그리고 치우를 모셔놓았습니다. 중국인들은 황제를 중국민족의 조상으로 믿어 의심치 않아왔습니다. 반면 치우는 황제와 싸워온 이민족의 대표로서 자기네들 역사 바깥으로 몰았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1990년대에 중국에서는 동북공정뿐 아니라 서북공정, 서남공정으로 현재 중국 영토 내에 있는 여러 다른 민족들을 자기네 역사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하면서 귀근원을 세우고 삼조당을 세웠습니다. 그러면서 이전에는 전혀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치우까지도 자기네 조상으로 편입시켰습니다.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나 중국의 여러 기록들, 그리고 『환단고기』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환단고기의 경우 기존 학계에서는 위서(僞書)라며 인정하지 않고 있죠.
 
 사마천은 『사기』를 쓸 때, 중국 각지를 답사 다닌 뒤 그것을 기록했습니다. 중국의 원 조상은 삼황오제(三皇五帝)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마천은 답사도 다녀보고 여러 사료를 봤지만 삼황은 중국의 실재했던 역사로 보기 곤란하다고 보고, 삼황에 대한 부분을 『사기』에서 빼버립니다. 현재 『사기』에 남아있는 삼황에 대한 기록은 당나라 시대 때 장수결이라는 인물이 집어넣은 거죠.
 
 사마천이 실제 역사적 사실로 생각한 것은 오제부터입니다. 오제의 첫 번째가 황제이고 이 황제(BCE 2692~BCE 2593)와 싸웠던 인물이 바로 치우입니다.
 
 『사기』에 따르면, 치우는 중국인의 조상인 황제와 싸웠는데, 머리가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고 썼습니다. 머리는 구리이고 이마는 쇠라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BCE 27~BCE 26세기) 치우로 대표되는 집단은 금속문명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치우를 중국이 1990년도에 자기네 조상으로 편입을 시켜놓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환부역조(換父易祖)입니다.
 
 
 
증거 3. 고인돌, 비파형동검 출토지역은 고조선의 영토
 고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 고인돌비파형 청동검입니다. 고인돌은 중국 요녕성에서부터 우리나라 남쪽 흑산도에까지 같은 형식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같은 내세관, 같은 문화권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산동반도에서도 한두 점 발굴됐는데, 화하족이라고 불리는 중국민족이 사는 지역에서는 단 한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식 동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나라의 모든 문명은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청동기나 철기도 다 중국에서 왔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교과서가 서술됩니다.
 
 그러면 실제로 그러냐? 청동은 주석과 아연의 합금인데, 우리나라 청동검에는 아연이 상당히 많이 들어있습니다. 아연은 섭씨 7∼8백도에서는 날아갑니다. 그런데 청동검을 만들려면 섭씨 1200도씨 이상 가열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당시에 청동기에 아연을 섞는다는 것은 굉장히 고난도의 기술입니다.
 
 우리나라 청동기에는 아연이 20∼30%씩 들어있습니다. 반면 중국 청동기는 아연이 거의 함유되어 있지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아연을 합금할 기술이 없었던 거죠. 고조선의 청동기술이 중국보다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비파형 동검은 중국지역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습니다. 이 비파형 동검의 출토지역이 바로 동이족의 세력범위, 즉 고조선의 세력범위하고 아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몽고 지역에서도 비파형 동검과 거푸집이 발견되었습니다. 거푸집은 비파형 동검을 만드는 틀인데, 그 틀이 나왔다는 것은 그곳이 고조선의 중심지역 중 하나라는 걸 뜻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포항제철이나 광양제철과 같이 철생산의 중심지라는 뜻이죠.
 
 고조선의 청동 제조기술은 당시 세계 최고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청동기에서 철기로 발전하는데, 철기 제조기술도 우리가 아주 압도적으로 발달했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는 철기는 위만이 갖고 온 것처럼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기록에 위만이 철기를 갖고 왔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고조선은 제후국을 거느린 황제국가였다
 중국 사료들을 면밀히 보면, 고조선은 산하에 여러 제후국들을 거느렸던 황제국이었습니다. 『후한서』 「동이열전」‘예조’에, ‘예군 남녀 28만 명을 들어서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는 나라를 뜻하고 군은 군장을 뜻하는 거죠. 즉 고조선은 예라는 나라를 속국으로 거느린 황제 국가라는 걸 뜻합니다. 예라는 나라만 해도 28만 명의 인구가 있었다는 거죠.
 
 
 
고조선과 한나라 전쟁의 진실
 우리나라의 주류학설에 따르면 고조선의 강역은 평안도 일대에 걸쳐있는 작은 나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고조선과 한나라와의 전쟁에 대한 기록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상당히 의문스러운 구절들이 많습니다.
 
 『한서』에 따르면, 조한(朝漢)전쟁은 고조선이 한나라에 조공 바치러 가는 여러 나라를 못 가게 막았기 때문에 전쟁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그러면 고조선이 평안도에 위치해 있었다면 무슨 재주로 만주나 북방에 있는 다른 민족들을 막겠습니까? 전제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그리고 저하고 연배가 비슷한 분들은 아마 초등학교 때 ‘한사군’이라 해서 ‘낙랑, 임번, 진둔, 현도’라는 이름을 달달 외우고 위치까지 외워야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한사군이란 게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거기에 설치했던 중국의 식민통치기관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달달 외워야 됐다? 그것도 해방된 나라에서. 그건 마치 조선에 주둔했던 조선 총독부의 1대 총독은 누구고, 2대 총독은 누구라는 것을 외워야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나라는 해방됐지만 역사관은 전혀 해방되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걸 말합니다.
 
 그리고 과연 고조선과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한나라가 이겼느냐? 한나라가 이겼다면, 한무제는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군들에게 포상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순체’라는 장군은 목을 베서 저잣거리에 걸어두었고, ‘양복’이라는 장군은 사형선고를 내렸는데 막대한 돈을 바치니까 신분만 강등시키고 목숨은 살려줍니다. 그 외에 ‘위산’과 ‘공선수’라는 장군은 사형당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계 전쟁 역사상 이긴 장수를 이렇게 대우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반면 고조선에서 한나라에 항복한 사람들은 전부 제후로 봉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제후로 봉(封)함 받은 지역이 산동반도에서부터 위쪽에 이르는 지역들입니다. 왜 고조선에서 한참 떨어진 이 쪽 지역을 봉토(封土)로 줬을까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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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함께 중요한 것이 한사군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 외웠던 한사군은 모두 한반도내에 있습니다. 이병도 씨가 쓴 『조선사대관』(동지사, 1948)에 나오는 내용이죠. 그리고 한사군의 중심인 낙랑군은 평양지역에 있다고 하죠. 낙랑군의 위치는 고조선사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낙랑군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하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사기』 「태강지리지」에 나옵니다.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라는 구절입니다. 따라서 수성현과 갈석산이 어딘가를 찾으면 낙랑군의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병도씨는 『한국고대사연구』에서 수성(遂城)에 대해 “맹랑하지만 황해도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라고 써놨어요. 자기 자신도 그 글에다가 ‘맹랑하지만’이라고 썼어요. 그리고 그 근거는 뭐냐? ‘수’ 자가 같기 때문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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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지명에서 ‘수’ 자 같은 지명 찾으면 백 개 이상 나옵니다. 그리고 갈석산이 있어야죠. 근데 없으니까 그냥 근처에 산 하나를 ‘저것을 갈석산이라고 했을 것이다’라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황해도 수안이 수성현이 됐고, 장성(만리장성)이 여기서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요새 중국박물관에 가면 만리장성이 한반도 황해도까지 내려와 있습니다. 그 이론 제공을 우리 사학계가 한 겁니다.
 
 그럼 실제로 수성현과 갈석산은 어디냐? 중국 하북성 창려현에 가보면 갈석산이 있습니다. 그 지역은 바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하고 아주 가까운 지역입니다. 또 『수서』에 보면 ‘수성현이 현재의 창려현’이라는 구절이 나와 있습니다. 모든 부분이 다 맞아떨어집니다.
 
 또 하나의 근거로,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 평양성을 침공할 때 좌군 12군, 우군 12군을 나눠서 진격로를 제시해줍니다. 그 진격로에 이 사군 이름이 거의 다 나옵니다. 낙랑이 평양에 있다고 하면 수양제가 북경 북부 탁현에서 24군을 출발시키면서 ‘너는 낙랑을 거쳐서 낙랑으로 와라’고 하는 셈이 됩니다. 공수부대라면 모를까. 앞뒤가 안 맞는 얘기죠. 결론적으로 중국 고대 기록들을 봐도 낙랑군 지역은 현재의 하북성 창려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사군이라는 것은 난하 근처 산해관 일대, 고조선 서쪽 끝자락에 일부 형식적으로 만들었을 수는 있지만 한나라가 고조선의 영토를 거의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종합해볼 때 고조선과 한나라와의 전쟁은 외형상 중국이 이겼다는 형태를 취했지만, 고조선은 전쟁에 져서 무너졌다기보다는 지배층이 분열하면서 자체 붕괴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는 요동반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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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당시 고조선 수도는 어디였는가? 흔히 고조선이 멸망할 때 수도가 대동강 근처 평양이었고, 위만이 쳐들어오자 고조선의 준왕이 남쪽으로 도주해서 마한의 왕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준왕의 도주로를 기록한 중국 기록을 보면 ‘주입해(走入海)’라고 쓰고 있습니다. 달려서 바다로 들어갔다, 해로로 도주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수도가 평양에 있었다면 충청도나 호남지역으로 도주할 때 어떻게 도주하겠어요? 이 곳은 배를 부려서 도주하는 것보다 육로로 가는 게 훨씬 빠른 지역입니다. 그러나 요동반도는 지형이 상당히 험합니다. 요동반도는 해로로 도주하는 게 훨씬 유리합니다.
 
 고조선 왕검성의 위치를 추적해볼 수 있는 또 다른 단서로, 중국 고대 지리서 중에 왕검성에는 패수가 흐르는데, 패수는 동남쪽으로 흘러서 동쪽 바다로 빠진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평양부근 대동강은 서해로 빠집니다. 이것도 안 맞는 것입니다. 고조선은 멸망할 당시까지도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반도에 있었던 것입니다.
 
 
 기마민족성을 회복하여 동이족의 새 역사를 열자

 우리 역사에서 한반도가 우리 역사의 주무대가 된 건, 불과 천 몇 백 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몇 배 더 긴 기간동안 내몽고 일대를 다 포함한 만주대륙이 우리 역사의 무대였고, 일본열도까지 포함한 대해양이 우리 역사의 무대였습니다.
 
 고조선의 청동검이 많이 출토된 내몽고에 가면 적봉 위쪽으로 시라무렌 강이 있습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염수(鹽水)’라고 나오는데, 그 시라무렌 강을 염수라고 하면 사람들이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팀에서 가보니 실제로 염수, 짠 물이 있으니까 그 주장을 맞다고 했어요. 그 옛날 고조선의 영토가 이렇게 광대했던 것입니다. 러시아에서 고조선을 연구한 유엔부틴이라는 학자는 고조선의 서쪽 국경은 ‘난하’ 라고 했어요.
 
 그러면 고조선이 당시에 어떻게 저렇게 광대한 지역을 영유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우리 민족이 본래는 기마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농경성이 가미가 된 것입니다. 이 고조선에서 부여가 나오고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옵니다. 그래서 고구려의 벽화를 보면 다 기마무사들이죠.
 
 우리 민족은 해방 후 많은 발전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 민족 내부에 내재해 있는 대륙성과 해양성, 기마민족성이 발휘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 아버님 형님 세대들은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면서 이만큼 나라를 일구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발휘되지 못하고 우리 역사가 한반도에 갇히면서 내부에서 싸우고 온갖 많은 분란들이 생깁니다. 우리 민족은 밖으로 나가야 됩니다.
 
 지난여름 유럽에 갔었는데, 영국의 대영박물관,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가보면 유물이라고 있는 게 전부 이집트나 서아시아에서 약탈해온 것들입니다. 약탈박물관이에요. 그런데 박물관을 나와서 보니 한국산 차들이 왔다 갔다 하고 유럽 사람들이 한국산 핸드폰을 들고 서로 통화를 하고 있었어요.
 
 20세기 역사는 제국주의 시대였습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힘으로 지배하고 노예로 삼아서 발전을 했어요. 그런데 식민지였던 나라 중에서 제국주의 본국에 최첨단 제품을 수출하는 유일한 나라가 한국입니다. 우리나라는 무력이 아니라 자력으로 이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발전 모델은 세계에 수출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 견지에서 제가 <동이족대연합도>라는 지도를 만들어봤습니다. 현재의 중국 영토는 본래 중국 영토라고 보기 곤란한 지역들입니다. 중국은 동북공정, 서북공정, 서남공정으로 현재 중국 영토 내에 있는 여러 민족의 지역들을 다 중국 영토로 편입을 시키고 있습니다.
 
 중국은 56개 민족이 합쳐져서 된 다민족 국가라고 합니다. 56개 민족 중에 중국 한족이 차지하는 인구 비율은 91%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55개 민족이 0.9%입니다. 그런데 영토로 보면 소수민족의 원래 영토는 63%고, 한족이 가지고 있던 영토는 37%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이 소수민족이 다 떨어져 나가면 91% 달하는 인구가 현재 영토의 37%에서 살아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죠. 그래서 중국에서는 다른 지역들에 대해 군사점령을 풀 생각이 전혀 없는 겁니다.
 
 <동이족대연합도> 에 따르면, 우리 민족을 비롯해서 만주족, 말갈족, 몽골족, 그리고 거란족도 일부 포함됩니다. 지금 중국에 점령당해 있는 여러 소수민족들이 나중에 독립해 나간다고 했을 경우, 땅덩어리로 따져도 중국과 뒤지지 않는 넓은 영토가 됩니다. 군사적으로 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자본과 기술, 몽골이나 만주지역의 영토나 지하자원. 이런 것을 연합하면 서로가 상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꿈으로 보이십니까? 지금 당장은 꿈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꿈을 꾸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꿈은 현실이 됩니다.
 
 우리는 해방 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경제발전과 정치민주화를 모두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아주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아젠다가 나와야 될 시점입니다.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한국의 발전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이룩한 성과를 제3세계에 같이 공유하고 발전해나가면서, 우리 옛 고대사의 강역들에 있었던, 우리 옛 선조들의 정신에 따라서 동이족을 연합해 나가는 것이 우리 민족이 21세기로 나아가는 길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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