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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정치의 유일무이한 여황제 측천무후 (則天武后 ? ∼705)

by 현상아 2007. 8. 20.



중국 당(唐)나라 제3대 왕 고종(高宗)의 황후. 성은 무(武), 본명은 조(照).

중국의 유일한 여제(女帝)로서, 약 15년(690∼705) 동안 전국을 지배하였다.
빼어난 미모로 14살 때 제2대 태종(太宗)의 후궁이 되었고, 태종이 죽자 비구니가 되었다가 다시 고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그 후 간계를 써서 황후를 쫓아내고 스스로 황후가 되어 황태자 충(忠)을 폐위시켰다.
683년 고종의 건강을 핑계삼아 스스로 정무를 관장, 독재권력을 휘두르며 천후(天后)라 칭하였다.
고종이 죽자 자신의 아들 중종(中宗)·예종(叡宗)을 차례로 즉위시키고 황족을 탄압하였으며, 690년 혁명을 단행하여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적인걸(狄仁傑)·위원충(魏元忠) 등 명신을 등용하기도 하였지만 악랄한 책략과 가혹한 탄압 정치를 하였고, 요승 회의(懷義) 및 장역지(張易之) 형제 등과 추문을 남기는 등 많은 비난을 받았다.
705년 정변으로 중종이 복위되고 당나라가 재흥된 얼마 뒤 병사하였다.

*측천무후(則天武后, 624년: 무덕(武德) 7년 1월 23일 ~705년: 장안(長安) 5년 11월 2일)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이며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여황제이다. 음탕하고 간악한 요녀(妖女)라는 비난과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명군이라는 칭송을 같이 받고 있다. 이름은 조(照)이고, 아명은 미랑(媚娘)이다.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이름을 조(曌)로 바꾸었다. 무사확(武士彠)의 차녀이다. 태어난 날짜는 정확하지 않고, 630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설도 있다.

무조는 624년 1월 23일에 당의 수도 장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무사확은 유명한 목재상인데, 수 양제 양광의 대토목 공사로 거부가 되었다. 617년 양광의 폭정 때문에 일어난 대반란에 당시 태원 유수 이연과 같이 참전하여 얼마 뒤 당나라가 건국되자, 황제가 된 이연에게 태원군공 겸 이주도독이란 작위를 받았다. 620년에 무사확이 본처를 잃고, 양씨를 새로이 처로 맞이해, 세 딸을 낳으니 그중 둘째가 무조이다.

무조는 어릴 때부터 대담하였고, 말타기와 글읽기를 좋아하여 성격이 적극적이었다고 전해진다.


*궁녀 시절

636년, 당 태종 이세민이 황후 장손씨를 잃자, 그 이듬해에 무조의 용모가 빼어나다는 얘기를 듣고 무조를 재인으로 삼았다. 이 때 그녀의 나이 겨우 14세였는데, 그녀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인데다가, 애교를 부릴 줄 몰라 이세민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무조는 이세민이 죽을 때까지 12년 동안, 승은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649년에 이세민이 붕어하고, 9남인 이치가 황제에 올라 고종이 되었다.

그리고 무조는 선제의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 하다는 법도에 따라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에 들어갔다. 이치는 태자일 때, 부황 이세민을 간호하던 무조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그녀에게 반했다.

이치는 분향차 감업사에 들렀는데, 거기서 무조를 본 순간 또다시 옛정이 떠올라 결국, 그녀를 데리고 황궁으로 들어갔다.


*재입궁과 암투, 그리고 황후

무조가 황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로는 이치의 황후, 왕씨의 도움이 컸다. 왕씨는 이치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소숙비를 질시했는데, 그런 그의 마음을 소숙비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무조를 불러들이라 이치에게 부추겼다. 그러나 이것은 여우를 잡기 위해 범을 불러들인 격이 되었다.

무조는 이치와의 사이에서 모두 4남 2녀의 자녀를 낳아 이치의 사랑을 차지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황후 왕씨와 결탁하여 소숙비를 폐출시켰다. 이리하여 무조는 비(妃)가 되었다. 하지만, 야심만만했던 무조는 왕씨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그들을 이용하여 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무조는 어느날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을 황후 왕씨가 매우 좋아하였다. 하루는, 왕씨가 무조의 딸을 보고간 후, 무조는 자신의 손으로 딸을 목졸라 죽여버렸다. 그리고 딸의 시신을 이불로 덮어두었다.

이 때, 고종 이치가 들어와 딸을 보러 왔다가 죽어있는 것을 확인하자, 무조는 이 모든 것이 황후의 소행이라 모함하였다. 이에 이치는 황후 왕씨를 폐서인시키고, 무조를 황후로 삼으니, 이 때가 654년 10월 13일이었다.

무조는 황후가 되고 나서도 왕씨와 소숙비를 가만 놔두지 않았고, 그녀들에게 곤장 백 대를 치고 다리를 잘라, 깊은 항아리에 가두어 죽어가게 하였다고 한다.


*비정한 어머니

황후 무씨는 가장 먼저 고종 이치의 외숙부이자, 승상인 장손무기를 자살시키도록 강요했다. 또한, 장손씨 일가를 모조리 몰살시켜버렸다. 656년, 무씨는 황태자였던 이충에게 여러 죄를 뒤집어씌우고 폐위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장남 이홍을 앉혔다.

이런 그녀의 전횡을 보다 못한 이치가 대신들을 은밀히 불러 무씨의 폐위를 의논하였으나, 무씨의 심복들이 그 사실을 알고 무씨에게 밀고하였고, 그녀는 대신들을 폐황태자인 이충과 대역죄를 꾸미려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모두 처형해버렸다. 이충은 검주로 귀양가고, 664년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무씨는 실제로 대단한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치에게 '건언12사'라는 건의문을 올렸고, 이치는 이를 모두 수용하였다. 얼마 뒤, 이치의 건강이 악회되자, 이치는 황태자 이홍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했다. 이홍은 총명하고, 겸손하였으며 이치와 대소 신료들에서도 신임이 두터웠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무씨는 675년 이홍에게 독약을 보내 그를 죽였다.

그 후로, 그 다음 아들인 이현(李賢)이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이현 역시 죽은 형 이홍 못지않게 총명하였다. 무씨는 역시 위기감을 느껴 이현에게 여색을 밝힌다 모함을 하였고, 680년에 이현은 황태자에서 폐출당하고, 684년에 파주(巴州)에서 어머니 무씨가 보낸 자객들에게 죽음을 당했다.


*황제로 향하는 발걸음

무씨는 자신의 셋째 아들 이현(李顯)을 새로이 황태자로 삼았다. 그는 형들과 달리 유약하였고, 어머니의 말에 절대 순종했다. 3년 뒤인, 683년 고종 이치는 붕어하였고, 황태자 이현이 황제에 오르니 이가 중종이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무씨는 그를 폐위시켰다. 이유는 바로 이현의 처인 황후 위씨와 그 아버지 위현정이 정사를 농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현을 여릉왕으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소생 중 막내아들인 이단을 황제에 올리니 이가 바로 예종이다.

이때부터, 그녀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모든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다. 무씨는 낙양을 신도(神都)라 고치고, 관제도 새로이 개편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대신들도 적지 않았다.

684년 9월, 양주의 서경업이 먼저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진군하였는데, 그 격문을 낙빈왕이 썼다. 무씨는 그 격문을 보고 낙빈왕이 자신의 수하에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며, 어쨌든 그녀는 30만의 진압군을 파견하여 40일만에 그 모든 반란이 평정되었다. 그리고 무씨는 이 반란에 동조하였던 모든 대신들을 처형시키고, 내각을 새로이 개편하였다.

무씨는 하늘의 뜻을 거론하며, 여론을 조작하기도 했는데, 그녀의 조카 무승사가 '성모임인 영창제업(聖母臨人 永昌帝業)' 즉, 황태후께서 군림하시니, 황제의 기운이 대대손손 번창하리라는 쓰여진 돌을 가져와 무씨에게 바쳤고, 이것을 본 무씨는 기뻐하여 연호를 '영창'으로 고쳤다. 한편, 당 고조 이연의 11남인 한왕 이원가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할 뻔 했으나, 무씨는 군사를 보내 이를 진압함으로써 자기의 황제 즉위에 대한 모든 장애물을 치우고 말았다.


*유일무이한 여황제

690년 9월 9일 중양절을 기해, 무씨는 예종 이단을 황제에서 폐하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다. 자신을 측천 금륜대성신황제(則天 金輪大聖神皇帝)라 칭했고 국호를 대주(大周),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으며 도읍을 장안에서 신도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역사에서는 그녀가 세운 주나라를 서주, 동주와 구분하기 위하여 그녀의 성 무씨를 따 '무주(武周)'라 불렀다. 무씨는 황제에 오르자마자, 악독한 대신들을 임명하여 당 황조의 종친과 구대신들을 잔혹하게 몰살시켰으며 국법을 더욱 엄히 하였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제대로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있지 않았던 과거제도를 다시 개편하였고 이로 인해, 여기서 뽑힌 신흥 세력들이 많았다. 이들은 훗날 이융기를 도와 '개원의 치'를 성립시키는데 일조한다. 무씨는 이러한 사람들을 많이 중용하여, 그들을 지지기반으로 만들었다. 또한, 당나라 때도 실력이 있던 대신들을 중용하였다. 이들이 적인걸, 장간지 등이다.

또한, 과거를 회시, 공사, 전시의 순으로 삼아서, 국가에 필요한 많은 인재들을 배출, 적재적소에 등용시켰다. 그녀가 다스리던 시기는 태종 이세민이 다스리던 시대에 버금갔고,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하였다. 무씨는 근무가 태만한 관리들은 모두 파면하였으며, 심지어는 잡아 죽이기까지도 했다. 무씨는 또한 불교를 중흥시켜, 전국에 많은 불교 사원을 세우고 많은 승려들을 양성시키도 하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러한 그녀의 치세를 '무주의 치(武周之治)'라 불렀다.

무씨는 자식교육도 대단히 엄격히 시켰는데, 그녀가 가장 사랑한 딸 태평공주를 엄격히 가르쳐, 법을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조카 무승사도 꽤 뛰어난 정치역량을 가지고 있었으나, 권력이 매우 커져 무씨와 조정 대신들의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환관 설회의는 무씨의 총애를 등에 업고, 횡포를 일삼기도 하였다.


*여걸의 만년과 죽음

만년에 이르러, 무씨는 조카 무승사에게 황위를 물려줄지, 아니면 당 황조의 황태후로 돌아가야 할지라는 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무씨 황조를 잇는 것에 대해 적인걸 등과 같은 여러 재상들과 신료들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699년, 무씨는 유페되어 있던 여릉왕 이현을 다시 태자에 봉했다.

6년 뒤인, 705년에 무씨는 병에 걸렸고, 이러한 때에 재상 장간지가 군사들을 이끌고 무씨가 와병 중인 전각으로 가 당 황조의 복원을 요청하였고, 무씨는 이를 승낙하여 당 황조가 15년만에 복권되었다. 그리고 중종 이현이 다시 황제에 즉위하였다. 무씨는 그리고 최초의 여성 태상황이 되었다.

그 해 11월, 무씨는 중종 이현과 막내아들 예종 이단, 막내딸 태평공주 등을 불러놓고 무씨 일가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죽은 뒤에 황제가 아닌 황후로 칭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 억울하게 자신의 손에 죽었던 폐황후 왕씨의 일가 역시 사면 복권해달라 간청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신의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 명하였다.

705년 11월 2일, 거의 반 세기동안 천하를 다스렸던 여걸인, 측천 성신대황제 무조는 장안 상양궁 선거전에서 82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 그녀는 비록 잔혹한 정치를 펼쳤으나, 이러한 그녀의 정치는 당 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이후 성공한 정치를 펼쳐, 훗날 당 현종 이융기의 '개원의 치'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측천무후 이전에 있던 귀족의 혈통 중심의 관료제에 능력 위주의 관료제의 가능성을 심어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그 이면에 정적을 지나치게 잔혹하게 살해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능력 위주의 등용은 뒷날 '개원의 치'를 이루는 발판이 되었다.


[편집] 연호
천수(天授) 690년 ~ 692년
여의(如意) 692년
장수(長壽) 692년 ~ 694년
연재(延載) 694년
증성(證聖) 695년
천책(天冊) 695년
등봉(登封) 695년 ~ 696년
통천(通天) 696년 ~ 697년
신공(神功) 697년
성력(聖歷) 698년 ~ 700년
구시(久視) 700년 ~ 701년
대족(大足) 701년
장안(長安) 701년 ~ 705년



전 임
폐황후 왕씨 당나라 황후
655년 - 683년 후 임
황후 위씨

전 임
- 제1대 중국 무주 황제
690년 - 705년 후 임
-
(당 황조로 복고)

전 임
4남 당 예종 이단 중국 황제
690년 - 705년 후 임
3남 당 중종 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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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624년 태어남 | 705년 죽음 | 당나라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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