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 폐지 2달새 1만3000여명 姓 변경 신청
ㆍ재혼·싱글맘 고통의 눈물들 ‘鐵의 성’ 녹여내
“내 말이 거짓말이면 내가 성(姓)을 간다!”
이런 호언장담형 관용어도 조만간 사라질 것 같다. 이미 힘을 잃었지만 출가외인이란 말도 마찬가지 신세가 될 날이 머지 않았다. 과거엔 절대 불가했던 일, 그리고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일로 여겨졌던 부계의 성(姓)을 바꾸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현실이 되었다. 부부가 합의하면 자녀에게 아버지의 성이 아니라 어머니의 성도 물려줄 수 있는 세상이다. 최근 탤런트 최진실씨가 자녀 성을 바꾸겠다고 해 더욱 관심을 끌고있다.
올해부터 호주제 대신 가족관계등록제가 시행되면서 재혼 후 자녀의 성과 본을 변경하거나 친양자입양 신청을 하려는 사람들이 늘었다. 밀려드는 문의와 사건 처리를 위해 법원은 담당 재판부를 증설했다.
과거 가족법 체계에서는 ‘부성주의 및 성 불변의 원칙’으로 성 변경이 원천봉쇄돼 있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호주제가 폐지되고 가족관계등록제가 시행되면서 성과 본을 변경하려는 이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미 변경한 이들도 적지 않다.
폭증하는 성 변경 신청
지난 1월 개정민법이 “자(子)의 복리를 위하여 자의 성과 본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는 부모 또는 자의 청구에 의하여 법원의 허가를 받아 이를 변경할 수 있다. 다만 자가 미성년자이고 법정대리인이 청구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제777조의 규정에 따른 친족 또는 검사가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면서 자녀의 성과 본 변경이 가능해졌다.
이후 지난 1월 한달 동안에만 대법원에 성 변경 신청을 한 이들이 전국에 7000여명에 이른다. 2월 말까지 모두 1만여명이 성 변경 신청을 했다. 대법원 상담실 및 성 변경 전문변호사나 법무사 상담실에 문의신청이 쇄도하자 서울가정법원은 비송단독 재판부 1개와 가사단독 재판부 3개를 증설했다. 인터넷에도 상담 사이트와 전문법률사무소 안내가 가득하다.
상담자 대부분은 재혼한 여성이 전 남편의 성을 가진 아이를 현재의 남편의 성으로 변경하거나, 혹은 혼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에게 자신의 성을 주려는 싱글맘들이다. 결혼하는 3쌍 중 1쌍꼴로 이혼하고, 이혼가정의 35%가 10대 이하 어린자녀가 있으며 이혼커플의 3분의 1이 재혼(2006년의 경우 재혼건수는 4만1325건)하고 재혼녀와 초혼남의 결혼이 늘어나는 현실에서 성 변경 신청은 그동안 고통받던 이들에겐 구세주인 셈이다.
특히 김미화, 최진실씨 등 유명 연예인들이 자녀의 성 변경 신청을 하면서 대중들의 관심이 커졌다. 재혼상담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재혼 주인공’으로 뽑혔던 김미화씨는 지난 1월2일에 증빙서류를 첨부, 두 딸의 성 변경 신청을 해서 2월 중순에 허가를 받았다. 2005년 전 남편과 이혼 후 두 딸을 키우다 2007년 성균관대 체육과 윤승호 교수와 재혼한 김씨는 고2, 중3인 두 딸이 새 아버지의 성을 원해 변경을 신청했다. 호주제 폐지 홍보대사로 활동했던 김씨는 재혼으로 윤씨의 전처 소생 두 아이를 포함, 네 아이의 어머니로 행복한 가정을 이끌고 있다. 한편 2003년 야구선수 조성민씨와 이혼한 후 아들 환희와 딸 수민을 키우는 탤런트 최진실씨도 아들의 초등학교 취학을 앞두고 자신의 성으로 바꾸기 위해 성 변경 신청을 했으나 1차엔 기각돼 다시 자료를 갖춰 신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등록관계제도 시행 이후 국내 최초로 자녀 성 변경 결정을 받은 주인공은 전남 순천의 강모씨다. 1998년 일본인 남편과 결혼해 2001년 딸을 낳은 강씨는 2003년 2월 이혼하고 전 남편과 합의하에 자신이 친권자로 딸을 한국 호적에 올렸다. 그 후 2003년 12월 한국인 남편 김모씨와 재혼, 이듬해 2004년 아들도 낳았다. 딸의 성인 강씨를 현재 남편의 성인 김씨로 바꿔달라는 강씨의 신청은 지난 1월4일 법원으로부터 받아들여져 딸은 이번에 입학한 초등학교에서 새 아빠의 성을 단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광주지법 순천지원 가사2단독 고영석 판사는 △강씨가 일본인 전 남편으로부터 양육비를 지원받지 않았고 현재 남편이 딸을 실질적으로 양육하고 있는 점 △강양이 초등학교에 취학했을 때 동생 김군과 성이 다른 데 따라 예상되는 (주변의 시선 등) 어려움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으며 강양의 자아권을 보장하기 위해 성 변경을 신속히 결정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들의 경우 비교적 이른 결정을 받았지만 성인들도 허락을 받은 사례가 많다. 춘천에 사는 이모씨(44)도 결혼하지 않은 미혼모 상태로 낳아 생부의 호적에 올려놓았던 딸(20세)의 성을 재혼한 남편의 성 최씨로 바꿔 달라고 신청해 결정판결을 받았다. 춘천지법 이병삼 판사는 “딸도 현재의 아버지와 동생들이 좋다며 성본 변경을 원했고 생부 역시 성본을 바꾸는 데 동의했다”면서 “자녀들의 장래와 가족정체성 등을 감안할 때 성본을 바꾸는 것이 가족관계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결정 이유를 밝혔다.
성이 달라 고통받는 가족들
이렇게 봇물 터지듯 성 변경 신청자들이 줄을 잇는 것은 그만큼 고통 속에 살아왔기 때문이다. 부모의 이혼으로 상처를 입고 새로 맞이한 가족들 사이에서도 성이 달라 친지나 이웃, 학교에서 당하는 편견과 갈등의 아픔은 직접 겪지 않은 이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라고 한다. 재혼 뒤 전 남편과의 사이에 낳은 아이를 사망 혹은 실종신고를 낸 후 마치 다른 아이처럼 새 남편의 아이로 입양하거나 새로 출생신고를 했다가 들통나 범법자가 된 이들도 있고 아예 해외로 이민을 간 가족도 많다. 첫 남편의 반복된 외도와 폭력으로 이혼, 두살 난 딸을 데리고 10년 전 재혼한 김은영씨는 “새 남편의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아이들의 성문제로 인한 아픔은 치유되기 힘들다”고 했다.
“딸은 지금의 아빠를 친아빠로 알고 자랐어요. 지금 남편의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입학해서야 오빠랑 성이 다른 것을 알고 또 친구들이 놀리자 아이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했어요. 어떤 엄마는 선생님께 따로 부탁해 아이의 성을 새 남편 것으로 바꿔서 불러달라고 했다는데 그래도 언젠가 알려지더군요. 주민등록에도 딸아이는 저와 동거인으로만 되어 있죠. 정작 생부는 재혼해서 자기 아이들을 낳고 딸아이한테는 신경조차 안쓰는데 왜 우리 모녀만 고통을 겪는지 모르겠어요. 또 가족 사이에 조그만 갈등이 생겨도 새 남편에게도, 딸에게도 제가 죄인인 것 같아요.”
성 변경의 요건
김씨는 딸이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성 변경이나 친양자 입양을 신청할 예정이다. 하지만 성 변경 신청이 모두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자녀의 성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성’ 때문에 고통받았다는 것을 문서로 입증해야 한다. 부모의 편리성이 아니라 아이의 복리를 위한 것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재혼한 새 아버지의 성으로 바꾸려면 새 아버지가 아이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줄 만큼 양육의 의무를 다했는지, 그리고 아이가 의사표현이 가능할 경우 아이도 성 변경을 원하는지 등이 중요한 판단기준이 된다. 그래서 법원에 △새 아버지가 낸 아이의 병원비·학원비 납부액 등 지출 현황 △친아버지의 양육 기간 △친아버지의 면접 교섭권 △재혼까지 그리고 재혼 이후의 기간 등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거나 증빙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새 가족의 결속력’도 중요하다. △재혼 시기와 유지기간 △새 아버지의 연령이나 이혼경력 △새 아버지와 친어머니 사이에서 낳은 자녀의 존재여부나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의 존재 여부 등도 법원의 판단기준이 된다. 자녀가 중학생 이상의 연령일 경우 직접 심문기일에 참가해 성 변경에 대한 의사를 들은 후 결정에 반영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최근 자전적 소설 ‘즐거운 나의 집’을 펴낸 공지영씨는 세 번의 결혼과 이혼으로 각각 성이 다른 세 남매를 혼자 키우고 있다. 숱한 고통을 체험해 “불법으로 아이들의 성을 고치고 감옥으로 가고 싶은 심정”이라고 공개적으로 글을 썼고 아이들에게 자기 성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지만 정작 아이들이 “공씨로 바꾸기 싫다”고 해 성 변경 신청을 하지 않았다.
아이와 생모는 재혼한 아버지의 성으로 변경하기를 원했지만 아이가 친부와 계속 연락하며 친가와도 관계가 좋아서 성 변경 신청이 기각된 사례도 있다. 또 친어머니가 이혼 후 재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 남편에 대한 복수심이나 증오 때문에 자녀를 자신의 성과 본으로 바꾸려고 하는 경우는 변경결정을 받기 어렵다. 법원 측은 현재 겪는 어려움보다는 앞으로 자녀의 장래 인생을 고려해 친부와의 관계도 중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다. 이처럼 성이 다름에 따른 ‘고통 증명’을 구체적인 문서로 입증하기 위해 자녀의 성 변경을 위한 전문적인 브로커나 법률사무소가 급증해 법조계에선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떠올랐다. 변호사에게 의뢰할 경우 300만원, 법무사를 통하면 30만~5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
주위의 편견이나 비용보다 더 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친부의 태도다. 성과 본 변경의 경우 신청 자체는 동의없이 가능하지만 가정소송법 자체에 친권에 대해서 물을 때는 의견을 양쪽 모두에게 구하도록 돼 있기 때문에 실제 변경과정에서 동의를 구할 수밖에 없다. 양육비를 주기는커녕 제대로 만나지도 않았으면서 “절대 내 자식의 성을 바꾸게 할 수 없다”거나 “(거액의)돈을 내놓으라”고 뻔뻔하게 요구하는 파렴치한 아버지들도 신청인 10명 중 2명꼴이라고 한다.
친양자 입양제
성본 변경과 함께 친양자 입양제도를 원하는 이들도 많다. 성과 본의 변경은 친아버지 쪽의 친족관계 변동없이 성과 본만 변경하는 것이어서 새 아버지의 성을 따르더라도 친부와 자의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친양자 입양은 친부의 면접교섭권이 박탈되고 친부와 완전히 남남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친아버지가 사망한 경우가 아니라면 생부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또 자녀가 15세 미만이어야 해서 그 이상 나이의 자녀들은 친양자 입양이 불가능하다. 친양자 입양의 경우 연령제한뿐 아니라 상속 등의 문제가 있어 성 변경에 비해 10분의 1 정도 수준의 신청이 이뤄지고 있다.
이지은 변호사는 “이혼여성이 자녀동거인에서 법적으로 혈연관계임을 인정받고, 재혼가정이 현실대로 법률적 가족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성 변경의 커다란 효과이지만 달라진 법제도만큼 재혼가정과 자녀를 바라보는 편견이 사라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왜 난 아빠와 성이 달라요?”란 아이의 물음에 고통받던 가족들에겐 “성이 달라도 서로 사랑하면 행복한 가정”이라고 인정해주는 따스한 시선들이 법정의 성 변경 허가보다 더 귀한 선물이 아닐까.
〈 유인경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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