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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이모저모/History

워터게이트 사건 청문회 개시(1973)외 5월17일 속의 역사

by 현상아 2008. 5. 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발표(1980)

1980년 오늘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안이 의결된다.

사실상 전두환, 노태우 씨 등 신군부세력에 의해 결정된 조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 이후 확산된 국민들의 민주화 운동을 원천봉쇄하는 게 비상계엄 확대의 목적이었다.

비상계엄 포고령에 따라 모든 정치활동과 집회·시위가 금지되고 언론·출판에 대한 사전검열이 시행됐다.

신군부는 이날 곧바로 전남대 등 전국 대학들에 공수부대원들을 투입시키고 김대중씨 등 민주화를 요구하는 재야인사들을 체포했다.

이로써 군부독재 종식과 민주사회 건설의 열망을 표출시킨 이른바 ’서울의 봄’은 이날 막을 내리고 이튿날 5.18 민주화운동이 시작된다.

▶ 이중간첩 이수근 사형 확정(1969)

1969년 오늘, 위장간첩 혐의로 기소된 이수근 씨의 사형이 확정됐다.

7일 전인 5월 10일 열린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항소만료일인 5월 17일이 지나도록 항소하지 않아 사형이 확정됐다.

이 씨는 사형이 확정된 지 47일 만인 같은 해 7월 3일 교수형에 처해진다.

이 씨는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에서 북한 중앙통신사 기자로서 군사정전위원회를 취재하다 UN군 대표의 승용차에 재빨리 뛰어들어 월남귀순하는 데 성공했었다.

그러나 이 씨는 귀순 2년 뒤인 1969년 1월 27일 콧수염과 가발로 위장하고 위조여권으로 김포공항을 빠져나간 뒤 홍콩과 방콕을 거쳐 베트남 호찌민 공항까지 갔다가 1월 31일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체포돼 압송됐다.

그의 이른바 이중간첩 행위가 남한 정보당국에 의해 날조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씨는 남한 탈출 후 홍콩에서 이틀 동안이나 머무르면서도 중국을 통해 북한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또 그가 탈출 목적지를 북한이 아닌 중립국으로 잡았던 사실, 탈출을 도와준 공범 두 명에 대한 재판이 계류 중인 가운데 사법당국이 주범인 이 씨를 먼저 사형시킨 점 등이 석연치 않은 부분으로 남았다.

그는 사형 직전 남긴 유언에서도 이중간첩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다.

▶ 워터게이트 사건 청문회 개시(1973)

1973년 오늘!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몰고 올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미 상원의 청문회가 시작됐다.

이 청문회는 텔레비전으로 미국 전역에 방송됐다.

이튿날인 5월 18일에는 아치볼드 콕스(Archbald Cox) 하버드대 교수가 특별검사로 임명되면서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작업이 본격화된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1972년 6월 비밀공작원들이 워싱턴 워터게이트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벌인 범행이었다.

미 상원의 청문회와 콕스 특별검사의 집요한 조사가 진행됐고 워싱턴포스트 등 언론사들도 이 사건을 끈질기게 취재해 보도했다.

콕스 특별검사가 임명된 지 5개월 만인 1973년 10월, 그를 해임하라는 닉슨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한 법무장관과 차관, 그리고 콕스 검사가 한꺼번에 해임당하는 이른바 '토요일의 대학살'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무마되지 않는다.

대통령 직무실에서 이뤄진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가 증거물로 제출되면서 결국 닉슨 정권의 선거방해, 수뢰·탈세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만다.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 발생한 지 2년 2개월 만인 1974년 8월 8일 마침내 하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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