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만사 이모저모/다큐멘터리 및

[스크랩] 인물_도미부인 설화

by 현상아 2011. 7. 22.

 

역사를 변동시키며 주도하는 왕이나 귀족들이 아닌

그 역사의 흐름안에서 영향받으며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좋은 설화를 발견하게 되어 조사해보았습니다.

이 도미부인이야기를 각색,수정하게 되어 디테일한 컨셉을 잡아갈것 같습니다.

아래는 간략한 도미부인 설화의 내용이고

그 다음 글은 월탄 박종화 님의 도미부인설화를 바탕으로 지은 소설입니다.

 

 

도미부인 이야기

(한산기)에 수록된 내용..

도미라는 사람은 비록 신분은 보잘 것 없었지만 자못 의리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부인도 고울 뿐 아니라 정조가 있어 무릇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개로왕이 이 소문을 듣고 도미를 불러 이르기를

"대체로 부인의 덕은 정절로서 으뜸을 삼기는 하지만 만약 으슥하고 컴컴하여 사람이 없는 곳에서 달콤한 말로 꼬인다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드물겠지!"라고 하였다.

그러자 도미가 대답하기를

"사람의 마음이란 헤아릴 수 없지만 저희 아내와 같은 사람은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한다.

개로왕이 이를 시험하여보고자 사건을 만들어 도미를 왕궁에 머무르게 하고는 측근 신하로 하여금 왕의 옷과 말과 종자를 빌려주어 밤에 그 집에 가게 했는데, 미리 사람을 보내어 왕이 온다는 기별을 보냈다.

이윽고 개로왕으로 위장한 신하가 찾아와 도미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래 전부터 너의 아름다움을 듣고 도미와 장기 내기를 하여 이겼다. 내일은 너를 들여다 궁녀를 삼을 터이니 지금부터 네 몸은 나의 것이다" 라고 하고는 겁탈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도미 부인은

"국왕이 망령된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니, 제가 감히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대왕이 먼저 방에 들어가시면, 제가 옷을 갈아입고서 들어가겠습니다"라고 하고 계집종을 불러 단장시켜 들어가 수청을 들게 하였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된 개로왕이 속은것에 대한 분노를 도미에게 돌리면서 그의 두 눈을 뽑아 배에 태워 강물에 띄워보냈다.

그런 후 개로왕은 도미부인을 끌어들여 억지로 강탈하려고 하였으나 도미부인이 이를 알고 도망하였다. 강어귀에 이르러 강을 건널 수 가 없음을 한 하면서 통곡하자, 갑자기 배 한척이 나타나 그 배를 타고 천성도라는 섬에 이르러 남편을 만났는데, 그곳에서 도미는 풀뿌리를 캐어먹으면서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도미와 그의 부인은 그 길로 고구려로 피신 하였 다. 이 소문을 들은 고구려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옷과 밥을 주어 구차스럽게 살면서 객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아랑의 정조

박종화

1

아랑― 아랑은 백제의 새악시다. 아랑의 어여쁜 소문은 서울 북한 및 천호 장안에 자자하게 퍼졌다. 아랑의 남편인 도미는 솜씨 있는 목수로 그의 이름이 백제 서울에 유명했지마는, 그보다는 어여쁜 아내 아랑을 가진 복성스런(복 있어 보이는) 청년 도미로 이름이 더 높았다.

‘저 사람이 유명한 목수 도미야.’ 할 때보다도, ‘저 사람의 아내 아랑은 여간 어여쁜 것이 아니야. 왜 그 아내를 잘 두었다는 목수 도미란 사람 있지 않어? 바로 그 도미야.’ 듣는 데서나 아니 듣는 데서나 사람들은 이렇게 도미를 소개했다.

자기의 천직인 목수보다도 반드시 어여쁜 아내를 잘 두었다는……, 그것을 먼저 입초수(입)에 올렸다. 자기의 재주가 인정되어 세상에 유명해졌다는 것보다도 자기 아내의 아름다운 것 때문으로 해서 자기의 이름이 세상에 인정된다는 것은, 장인(손으로 물건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의 그다지 마음 즐길 일이 아닌 것이 보통 심경일 것이지마는 도미는 여기에 대해서 조금도 불복(불만)이 없었다. 불복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도미는 오히려 빙긋 웃어 입이 슬그머니 벌려지고 말았다. 무척 사람이 좋은 때문도 되지마는 나라에 제일 가는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두었다는 행복스런 느낌이 도미의 가슴에 뻐근히 찼음이리라.

아닌게아니라 아랑은 무척 잘생긴 여자였다. 어여쁘다 해도 그대로 아기자기하게 어여쁜 편만이 아니다. 맑은 눈매하며 빚어 붙인 듯한 결곡(얼굴 생김새나 마음씨가 깨끗하고 여무져서 빈틈이 없음)하고도 구멍이 드러나지 않는 폭 싸인 아름답고 고운 코는 백제 여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수한 매력을 풍기는 미(美)지마는, 비둘기 알을 오뚝이 세워 놓은 듯한 동글 갸름한 얼굴판에 숱이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은 알맞은 눈썹과, 방긋이 웃을 때마다 반짝하고 드러나는 고르고 흰 이빨은 두껍지도 않고 얕지도 않은 하얀 귓불과 함께 홀로 아랑만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을 넋 잃게 할 매력이었다.

여기다가 아랑의 옷거리(옷을 입은 맵시)는 더욱 좋았다. 외로 여민 저고리 위의 날아갈 듯한 어깨판하며 거듬거듬 주름 잡은 눈빛 같은 흰 치맛자락엔 여위지도 않고 살찌지도 않은, 건강하고 젊음을 풍기는 탄력 있는 살결이 도마뱀처럼 물결쳐 흘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해서 아랑이 백제 서울에 제일 가는 미인이 될 수는 없었다. 아랑의 반듯한 이맛전 아래 고르게 벌여진 눈썹과 호수같이 맑은 눈매 근처에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부드러우면서도 서릿발같은, 사람이 감히 호락호락히 범하지 못할 맑고 맑은 기쁨이 떠돌았다.

여자란 흔히 아름다우면 음기를 품기가 쉬운 것이다. 그렇지 않고 처절하게 어여쁘다면 독기를 품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부드러우면서도 기품이 드러나고, 어여쁘면서도 결곡하기는 가장 드문 일이다. 억지로 우리가 구해 본다면 성스러운 관음 보살의 얼굴에서나 적이 이 고결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아랑을 한 번 본 사람은 백제 서울에 제일 가는 미인이라 떠들었고, 아랑을 한 번도 못본 사람이라도 떠도는 소문만 듣고 도미의 아내 아랑은 나라의 첫손을 꼽을 미인이라고 덩달아서 칭찬했다.

도미는 사실 행복스러웠다. 아내 아랑이 백제 서울 안에서 제일 가는 미인이 된다는 것도 사나이로 앉아서 즐거움의 하나지마는, 사실 아랑은 얼굴뿐만이 아니라 마음씨도 착하고 집안 일도 잘 보살폈다. 도미가 솜씨있는 목수로 나날이 예간다, 제간다 하고 으리으리한 대궐 이룩하는 일이나 대갓집 고래등 같은 기와집 짓기에 비두(첫째)로 뽑혀가는 동안은, 아랑은 길쌈을 짠다, 빨래한다, 온종일 부지런히 집안 일을 보살피기에 분주했다. 이리하다가 해가 설핏해서 서산에 걸릴라치면 또다시 부엌 속으로 뛰어들어가서 저녁밥을 잦히고(밥이 끓은 뒤에 불을 약하게 하여 물이 졸아들게 하고) 된장찌개를 끓여서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땅거미가 질 무렵, 도미가 일터에서 일을 마치고 아랑이 혼자서 기다릴 생각을 하고는 걸음을 빨리하여 휘파람을 불면서 동구 앞으로 들어서면, 아랑은 물묻은 손을 행주치마에 씻으면서 부리나케 삽짝문(잡목의 가지로 엮어 만든 문짝) 밖까지 쫓아 나가서 쌍긋 흰 이빨을 드러내 웃으며,

“도미! 어서 와요.”

하고 반갑게 도미의 팔뚝을 끌어안는다. 이럴라치면 도미는 온종일 그립던 아랑이 반가워서,

“아랑! 퍽 기다렸지?”

하고 마주 아랑을 껴안으며 아랑의 그 맑은 눈을 정열이 타오르는 도미의 눈으로 쓰다듬어 위로해 준다. 이럴 때마다 아랑의 길고 검은 속눈썹에는 반가움과 행복감에 넘치는 안개같은 눈물이 촉촉히 서리곤 한다. 도미가 먼지를 털고 세수를 하고 일터 옷을 벗어서 고운 옷과 바꾸어 입은 뒤에 밥상을 받고 앉을라치면, 아랑은 상머리 맡에서 배추김치를 찢어 주고 식어 가는 된장찌개를 다시 데워다 준다.

“밥 가지구 와, 우리 같이 먹어.”

도미가 이렇게 말할라치면 아랑은 새색시같이 부끄러워했다.

“이따 임자 상이 나거들랑.”

“이거 왜 밤낮 저 모양이야. 아랑이 밥 안 가지구 오면 나두 안 먹을 테야.”

도미는 머슴애처럼 골을 내고 숟가락을 내던졌다. 흘기는 눈에는 담뿍 정열을 싣고. 아랑은 못 이겨서 봉당(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마루를 놓을 자리를 흙바닥 그대로 둔 곳)에 내려가 숟갈 하나와 밥 한 사발을 들고 왔다. 오기는 왔으나 밥사발을 도미의 소반 위에는 올려놓지 않는다. 방바닥에 놓고 조심조심 숟가락을 옮긴다. 아무리 남편의 앞일지언정 행여 입안의 밥알이 보일까 하고. 날마다 하루 한 때 이때부터가 도미와 아랑이 가장 행복을 느끼는 때였다. 밥상을 물리고 나서 도미와 아랑은 마주 앉아서 온종일 지낸 일을 서로 이야기했다.

“도미, 오늘도 대궐 일 했소?”

“그럼, 대궐 짓기가 그렇게 쉬운가. 오늘은 전각(대궐)에 들보를 올렸지. 참 재목 좋드라. 바루 유주목인데, 천년은 묵었을 거야. 내 아람으로 네 아람은 되거든. 바루 아차산 꼭대기에서 벤 나문데, 소 사람 얼러서(합해서) 오백 명 품(어떤 일을 하는 데 드는 힘)이나 먹여서 끌어왔어. 나뭇결이 어떻게 좋은지 대패가 힘 안 들이고 잘 나가거든. 아무리 장인의 솜씨가 좋다손 치더라도 재목이 나쁘면 신이 나지 않거든!”

“아유, 천 년 묵은 나무! 그 나무, 구경 좀 했으면.”

“대궐을 다 지어 놓거든 내 솜씨도 보일 겸 한번 구경시켜 줄게, 아랑…….”

“이런 여염집(일반 백성의 살림집) 여자를 무어 함부로 들어가게 할 리가 있나…….”

“도편수(목수의 우두머리)한테 말하면 우리 아랑이야 못 구경시켜!”

“그럼 꼭 임자가 지은 대궐을 구경시켜 주어요. 도미!”

“염려 말어, 그까짓 거. 아랑! 오늘은 무어 했어?

“맞춰 보아.”

아랑은 상긋이 웃으며 도미를 쳐다본다.

“글쎄……, 오늘은 전부터 짜던 삼승(올이 굵은) 무명(솜에서 자아낸 실로 짠 옷감)을 끝마쳤을 게다.”

“아니야 틀렸어, 명주(누에고치에서 뽑은 실로 짠 옷감)를 시작했어. 설날 입을 도미의 저고리 바지를 할 양으루.”

“명주! 명주 옷은 난생 처음이로구나, 아랑 덕에 명주 옷을 다 입는다! 참 설날두 앞으로 서너 달밖에 안 남았지.”

도미는 사실 정말로 즐거웠다. 도미는 아내의 손을 이끌어 쓰다듬는다.

“우리가 혼인을 한 지도 벌써 이태(2년)째가 되지?”

아랑은 방싯 웃음을 머금고 소리 없이 고개만 까딱거린다.

“그런데 아랑! 인제 어린애를 하나 낳아야지.”

“듣기 싫어요.”

아랑은 부끄러워 도미의 무릎을 주먹으로 탁 치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손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서려 한다.

“못난이, 무에 부끄러워. 누가 있나베. 그런데 아랑, 가만 있어. 내 얘기 한번 듣고 일어나.”

도미는 아랑의 뿌리치는 손을 꽉 쥐고 놓아 주지 않았다.

“아이 아파…….”

아랑은 벌떡 다시 도미 앞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거 봐, 아랑! 나는 암만해도 아랑 때문에 큰일 났어. 목수 도미보다도 아내 아랑을 잘 둔 도미로 이름이 더 났단 말야. 누구든지 나를 보기만 하면 ‘오, 그 백제서 제일 가는 미인이라는 아랑의 남편 도미란 말야!’ 하구 이렇게 내 얼굴을 뚫어지도록 보군 하거든.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어깨는 막 으쓱해지지! 그런데 이거 봐요. 어떻게 아랑이 잘생겼다는 소문이 백제 서울에 자자한지, 하루는 대궐서 전각 들보 대패를 메기랴니까 역사(토목· 건축 등의 공사)를 간역하는(토목· 건축 따위의 공사를 돌보는) 대신이 지나가다가 대패질하구 있는 나를 유심히 딜여다보더니, ‘네 이름이 도미냐?’ 하구 묻기에 ‘네, 그렇습니다.’ 했드니, ‘오, 저 백제서 제일 가는 미인 아내를 두었다는 도미로구나.’ 하구 한동안 내 곁에 서서 대패질하는 모양을 바라보다가, ‘어 참, 대패질 잘한다, 너는 백제서 제일 가는 팔자 좋은 사람이다.’ 하구 한참 칭찬을 허구 가겠지. 내 코가 막 세 발이나 더 솟았지, 하하하.”

“아이 어쩌면, 부끄러워라…….”

아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푹 가리었다.

2

도미와 아랑의 깨가 쏟아질 듯한 재미있는 살림은 나날이 더 깊어 갔다. 이와 정비례해서 목수 도미의 아내 아랑의 아름답다는 소문도 날이 갈수록 서울에 더 자자했다. 도미는 행복스런 중에도 요사이 와서는 차츰차츰 형언해 말할 수 없는 한 조각 엷은 불안을 가슴속에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아랑의 아름답다는 소문이 너무도 지나치게 널리 퍼지는 때문이다.

신라 사람 입에도 올랐다. 고구려 사람 입에도 올랐다. 도미는 오히려 조금씩 괴롭고 무서움을 느꼈다. 도미가 가지고 있는 불안과 공포는, 마치 보배로운 구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너무 소문이 지나치게 자자하기 때문에, 행여 모르는 사이에 구슬을 빼앗겨서 도적 맞을까 하는 근심과 비슷했다.

도미는 전과 같이 일터에서 돌아와서 저녁밥을 물린 뒤에 아랑과 함께 뜰을 거닐었다.

달이 환하게 중천에 높이 솟았다. 가을이나 낙엽 구르는 소리조차 없었다. 기왓골에는 싸늘한 서리가 유리같이 깔리기 시작한다. 도미와 아랑은 손을 잡고 거닐다가,

“아랑, 춥지 않어?”

하며 도미는 달빛 아래 아랑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아니, 당신의 곁이면…….”

“당신의 곁이면?”

도미가 되받아 물었다.

“언제든지 춥지 않어요.”

이 순간 달빛 아래 해죽이 웃는 아랑의 얼굴은 정말 보배로운 구슬보다도 더 곱고 귀여웠다.

도미는 한 손으론 아랑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론 달빛 비치는 아랑의 웃는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도미는 이 고운 아내 아랑을 어떻게 주체해야 좋을지 몰랐다.

“아랑! 당신은 너무 이뻐.”

도미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뚝 떨어뜨린다. 아랑은 남편 도미의 심경을 알 리가 없다. 잠깐 동안 말없는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또다시 천천히 뜰을 거닐었다.

“아랑, 당신은 더 호강하구 싶지 않어?”

도미가 다시 말을 꺼낸다.

“당신의 곁이면.”

아랑은 말을 마치고 고래를 살래살래 흔든다.

“이거 봐, 이 목수 도미의 아내가 되기에는 당신이 너무 이쁘단 말야. 저 고래등 같은 기와집의 재상의 아내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장잣집(큰 부잣집) 맏며느리가 되든지 해야 할 감이란 말야. 이 목수놈 도미의 아내가 되기는 너무도 아깝단 말야.”

“도미! 별안간 그것은 다 무슨 소리요. 나는 재상도 싫어. 장잣집 며느리도 소원이 아니야. 마음 편한 당신의 아내가 제일 좋아.”

아랑의 얼굴엔 반듯한 기품이 서리었다.

“이거 봐, 아랑! 나는 겁이 나.”

“도미, 무엇이!”

“아랑이 너무 이뻐서 세도 좋은 재상이나 장잣집 아들에게 뺏길까 봐서.”

말을 마친 도미의 고개는 기운 없이 수그러진다.

“뺏으면 뺏겼지우? 개돼지요!”

아랑은 싸늘하게 노했다. 도미의 잡은 손을 뿌리친 채 마루를 향하고 올라선다. 달빛 속에 새침히 돌아서는 아랑의 뒷태도(뒷모습)는 부어 내리는 서릿발보다도 더 차갑다.

3

목수 도미의 아내, 아랑의 어여쁘다는 소문은 이 나라 왕 개루의 귀까지 들어갔다. 개루는 나라를 잘 다스리고 정사(정치에 관계되는 일)를 잘 베풀었다. 백성의 부세(세금을 매겨서 부과함)를 가볍게 하고 성과 연못을 잘 가꾸어 바깥 근심을 덜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영특한 임금이면서도 그에게는 한 가지 큰 병통(해가 되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색을 좋아해서 어여쁜 여자를 가까이 하는 일이었다. 한 사람 두 사람뿐만에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왕 자신은 조금도 이것을 뉘우치지 않는다. ‘영웅은 색을 좋아한다.’ 하는 옛말은 개루에게 있어서는 여간 아름다운 방패막이 거리가 아니다. 한 개의 말막음 거리가 될 뿐만이 아니라, 개루는 자기 자신이 색을 좋아함으로써 한 사람의 훌륭한 영웅인 것 같은 착각을 꿈꾸고 있었다.

어느 날 개루는 편전(임금이 평소에 거처하는 궁전)에서 신하와 더불어 정사 일을 의논하다가 일이 끝난 다음에, 이야기가 한가로운 여염의 적은 일에 미쳤다. 개루가 색을 좋아하는지라 신하는 백제 서울 미인의 이야기를 하다가 말이 목수 도미의 아내 아랑에게 떨어졌다.

“백제의 첫 손가락을 꼽을 미인은 목수 도미의 아내 아랑일 겝니다.”

하고 아뢰었다.

“목수로 어떻게 백제의 제일 가는 미인을 얻었소?”

개루는 기괴하게 생각했다.

“그게 다 연분입지요.”

“연분? 아니야, 우연이지!”

강한 성격을 가진 개루는 운명을 부정했다.

“내 후궁에 그래 아랑만한 미인이 없을까.”

색을 좋아하는지라 개루는 한번 아랑의 말을 듣고 좀처럼 생각을 끊을 수 없었다.

“어찌 대왕 후궁에 아랑만한 미인이 없사오리까마는 세상에서 이르기는 아랑은 신라에도 없고 고구려에도 짝을 구할 수 없는 미인이라 하옵니다.”

개루의 마음은 바짝 움직였다.

“한번 불러 보게 하오.”

우연한 이야기 한 마디가 일이 컸는지라 신하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부르시기야 어려운 노릇이 아니오이다마는 아랑이 올는지 의심스럽소이다.”

“내가 부르는 마당에, 일개 목수의 계집이 아니 와?”

개루의 성미는 부풀어올랐다.

“세상의 전하는 말을 들으면 아랑의 고운 점은 관음 보살의 고운 것과 같다 하옵니다. 고결하고 품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호락호락 넘보지 못한다 하옵니다.”

“관음 보살!”

개루의 호색(여자를 좋아함)하는 마음은 더욱 부채질 쳐진 셈이 되었다.

“관음 보살은 왕의 신하가 아닌가!”

개루는 호기롭게 배앝았다.

“잔말 말고 부르게 하오.”

급한 사자(명령을 받고 심부름하는 사람)가 도미의 집으로 띄워졌다. 도미는 전과 같이 대궐에서 일할 때다. 홀로 아랑이 집에서 이 광경을 당했다. 사자를 대한 아랑은 차가울 대로 차가웠다. 단정히 벼루에 먹을 갈고 간지(얇은 종이)를 펼쳐 글월을 썼다.

왕은 백성의 부모라, 어찌 부르시는 명을 거역하오리까 마는 사나이 몸이 아니옵고 남편 있는 계집의 몸이라 남편의 허락이 없이는 까닭 없이 왕명을 받을 수 없소이다.

아랑은 쓰기를 마친 다음 간지를 봉하여 공손히 사자에게 전했다. 사자를 보내고 초조하게 하회(회답)를 기다리고 있던 개루는 아랑의 정정당당한 구슬 같은 필적을 대하고 보니, 보지 못한 아랑이 더욱 그립고 잊을 수 없었다. 호화로운 왕의 위력으로 여태껏 수많은 여자를 다뤄 본 개루는 어디까지든 여자의 정조를 부인했다. 아랑― 관음 보살같이 결곡하고 아름답다는 도미의 처 아랑을 기어코 한번 손아귀에 넣고 싶었다.

땅에 떨어진 뒤에 처음으로 개루는 고민의 맛을 느꼈다. 위력으로 군사를 풀어 연약한 여자 아랑 하나를 잡아들이기에는 개루의 체모(체면)가 너무 깎여진다고밖에 뵈지 않는 때문에, 또한 백성들의 웃음을 사기도 쉽다. 어떻게 가만히 드러내 놓지 않고 아랑을 손 속에 넣을 것을 궁리했다. 정조― 여자의 정조란 다 닥쳐 보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개루는 잘 아는 때문이다.

두어 시간 뒤에 목수 도미는 개루의 편전 아래 불려졌다.

“이애, 네가 목수 도미냐?”

“네, 소인이 목수 도미올시다.”

도미는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도미는 대궐 짓는 데 무슨 잘못이 있었나 하고 마음속으로 지난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네 아내가 백제의 제일 가는 미인이라지?”

도미의 가슴은 아뿔싸 하고 선뜻 내려앉았다. 그러나 대답은 아니할 수도 없었다.

“남들이 그렇게 말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비로소 도미는 개루의 얼굴을 잠깐 쳐다봤다.

“범절이 있고 지조가 높다지?”

도미는 어떻게 대답해야 옳은지 몰랐다. 멍하니 다시 힐끗 개루를 쳐다본다.

“여자 쳐놓고 지조가 있다는 계집을 내 여태 보지 못했다. 네 아내도 그러할 게다. 더욱이 이쁜 계집일수록!”

말을 마치고 개루는 빙글빙글 웃으며 도미를 내려다본다. 마치 아랑의 정조를 비웃는 듯이…….

도미의 순되고 젊은 기운이 우쩍 일어났다. 옥보다도 더 깨끗한 아랑의 몸에 애매한 누명을 얹는 것이 분했다.

“다른 여자는 모르겠소이다마는 소인의 계집은 죽을지언정 두 마음이 없을 게올시다.”

도미의 머리에는, 지나간 달 밝은 가을밤에 아랑과 같이 뜰에 거닐던 생각이 번갯불같이 휙 지나갔다.

“그럼 내 시험해 보랴?”

개루는 여전히 능갈치게(교묘하게) 소리 없는 웃음을 웃으며 도미를 내려다본다.

“시험해 봅시오.”

결연히 말을 마치고 도미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도미의 몸은 처음과 같이 떨리지도 않았다.

4

뜻밖에 왕의 부름을 받았던 도미의 아내 아랑은 일단 거절하는 글월을 사자 편에 돌려보냈지마는 초조하고 불안하여 오히려 하회가 궁금했다. 어찌 된 일인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혹시 남편 도미가 죄를 짓지나 아니했나? 만일 죄를 지었다면 법소가 따로 있으니 법소에서 채근(어떤 일의 내용을 캐어 밝히거나 따지어 독촉함)하고 다스릴 일이지 왕이 친히 부를 까닭도 없는 일이다, 하고 이렇게 생각해 봤다.

남편이 하도 대궐 일을 잘하니까 그이에게 상을 내리고 나까지 대궐로 들어오라 한 것인가? 하고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

어떻든 조마조마 마음을 졸여 가며 어서어서 남편 도미가 돌아오기를 일각이 삼추(기다리는 시간이 매우 길고 지루함을 나타냄)처럼 고대했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갈가마귀가 뒷산 밖에 어지럽게 날랐다. 귀는 울타리 밖으로만 쏠려진다. 행여나 남편 도미가 돌아오는 씩씩하고 기운찬 발자취 소리가 들릴까 하고.

가을 해가 서산에 넘기는 토깽이(토끼)보다도 재빨랐다. 그러나 아랑의, 남편을 기다리는 초조한 마음은 하루보다도 길었다. 땅거미가 완전히 동구를 어둡게 했다. 그러나 남편 도미의 돌아오는 휘파람소리는 아직껏 들리지 않았다. 다른 날 같으면 벌써 도미와 밥상을 대하고 재미있게 술질(숟가락질)을 할 때다. 아랑은 배고픈 줄도 몰랐다.

유경(놋쇠로 만든 등잔 받침)을 꺼내 놓고 심지에 불을 다렸다. 방 속에 환하게 불이 켜지니, 벽에 비치는 아랑 제 그림자에 남편 ‘도미가……’ 하고 소스라쳐 놀래도 보았다. 한 식경(한 끼의 밥을 먹을 만한 시간) 두 식경 밤은 점점 깊어 갔다. 달도 없는 깊은 가을, 짙은 밤 앙상한 나뭇가지에 울고 남은 싸늘한 바람이 가끔가끔 쏴 하고 문풍지(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문짝 가에 붙인 종이)를 울렸다. 불똥을 튀기던 유경엔 심지조차 타 들어가서 불빛까지 희미했다. 아랑은 옥귀개(옥으로 만든 귀이개)를 뽑아 심지를 돋우었다. 잠깐 불빛은 밝았으나 초조한 마음속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내 아랑은 방문을 열고 뜰로 내려서서 삽짝문을 열고 여남은 걸음 떨어져 있는 이웃집 부전이를 찾았다. 부전이는 지난해 남편을 잃은 홀어미다. 아랑의 부르는 소리에 부전이는 들창문을 열고 자던 눈을 쓱쓱 비비며,

“웬일요?”

하고 물었다.

“좀 나와요. 저, 도미가 여태 안 돌아왔어. 쓸쓸해 혼자 배길 수가 있어야지. 나하고 둘이 있어 응, 부전이!”

“그게 웬일유, 밤이 꽤 이슥했는데.”

부전이는 일변(한편) 말하고 일변으론 부스럭거리며 치마를 두른 다음 문을 열고 아랑을 따라 섰다.

지척을 분간하지 못할 어둠 속에 하늘에는 별빛만이 총총했다. 아랑과 부전이가 마악 아랑의 집 방 속에 들어앉았을 때다. 동구 밖에 사람 소리가 두런두런하며 두서너 사람의 발자취 소리가 버적버적 들렸다.

“사람 소리가 나지?”

아랑은 부전의 얼굴을 쳐다본다.

“도미가 인제야 돌아오는 게지.”

두 사람은 일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뜰 아래로 내려섰다. 울타리 밖에는 횃불이 환하게 비치고 삽짝문이 스르르 열려졌다. 들어서는 사람은 도미가 아니요, 금관에 홍포(붉은 빛깔의 옷)를 찬란히 입은 왕 개루였다. 뒤에는 두어 사람의 시종이 따랐다. 아랑은 가슴이 출렁 떨어지고 부전이는 영문을 몰랐다.

횃불과 왕과 시종은 뜰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가 목수 도미의 집인가?”

시종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아랑은 설레는 가슴을 진정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도미의 아내 아랑이 누구인가?”

“제올시다.”

아랑은 손을 마주 잡고 공손히 허리를 구부렸다. 횃불이 더욱 가까이 비쳐졌다. 불 아래 비치는 아랑의 고운 때깔은 과연 월궁의 항아(달나라에 산다는 선녀. 절세의 미인을 비유한 말)가 아니면 그림에 보는 관음 보살이었다. 이윽이 아랑을 건너다보는 개루의 호화로운 얼굴에는 소리 없는 만족의 미소가 물결쳐 흘렀다.

“올라가자! 나는 이 나라의 왕 개루다.”

처음으로 개루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아랑의 가슴은 더욱 설레었다. 그러나 왕을 아니 인도할 수도 없었다. 아랑은 모든 설레는 마음을 누르고 태연히, 참으로 태연히 공손하게 왕을 방 안으로 인도하고는,

“누추한 천민의 집에 옥가(임금이 타는 가마)를 멈추시니 황감(황송하고 감격스러움)하오.”

하고 문 밖에 고요히 서 있다.

“아랑아.”

개루는 자리에 앉아 홀린 듯 아랑을 쳐다보다가 이렇게 아랑을 부른다. 아랑은 해사한 얼굴을 더욱이 단정히 가지고 허리를 굽혀 소리 없는 대답을 보낸다.

“아까 낮에 너를 불러도 오지 않기에, 네 남편의 허락을 맡아 내가 온 길이다. 너는 오늘 밤부터 내 후궁이 돼야 한다. 내일 아침엔 일찍이 대궐로 데려갈 것이고…….”

모든 일을 아랑은 비로소 알았다. 그러나 아랑은 조금도 황겁하지(두렵고 겁나지) 않았다. 맑고 맑은 눈에는 광채가 반짝하고 빛났다. 잠깐 동안 아랑은 새촘히 서 있다.

“싫으냐?”

“…….”

“싫으면 군사를 풀어 잡아갈 것이고…….”

“…….”

“네가 후궁으로 들어오기만 하는 날이면 호강이야 말할 거 있느냐, 백제 것이 모두 다 네 것이지.”

오뚝이 그림처럼 섰던 아랑은 깜짝하고 다시 눈동자를 굴리었다. 치맛자락이 가늘게 움직였다. 입에선 가벼운 한숨조차 나는 듯했다.

“정말이십니까?”

아랑의 말소리가 비로소 떨어졌다. 그러나 아랑의 눈은 차마 개루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럼 내가 실없는 말을 할 리가 있느냐?”

아랑의 목소리를 듣자 개루의 입은 빙글빙글 벌려진다.

“시키시는 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횃불을 끄고 시종을 물리쳐 줍시오. 목욕을 하고 단장을 하겠습니다.”

횃불은 꺼지고 시종은 물러갔다. 삽짝문이 소리 없이 닫혀졌다.

한 시각 뒤, 칠보 단장을 꾸민 아랑이, 어서 들어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개루가 앉은 방문 앞에서,

“유경의 불을 꺼 주옵시오. 남편 있는 몸이라 부끄럽사옵니다.”

옥방울을 굴리는 듯한 아랑의 목소리가 닫혀진 방문 밖에 떨어졌다. 개루는 미칠 듯이 좋았다. 용포 자락으로 유경 불을 후리쳐 껐다.

이튿날 동이 환해서 흐벅진 졸음에서 눈을 떠 보니, 자리 옆에 코를 골고 누운 것은 관음 보살 같은 아랑이 아니라 개기름이 얼굴에 지르르 흐르는 부전이었다. 개루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이미 소용이 없다. 아랑을 찾으니 간 곳이 없다. 건넛방은 덩그렇게 비었다. 증(화)이 열화(뜨거운 불길)같이 일어난 개루는 모든 것이 목수 도미란 놈이 있는 탓이라 인정했다. 팔분 이상의 도미를 시새는(공연히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도 섞였으리라.

대궐로 돌아오는 길로 개루는 도미를 역사를 잘못했다고 죄 주었다. 두 눈알을 뽑고 광나루 강으로 끌어다가 배에 태워 내쫓았다. 앞 못 보는 도미는 무슨 죄를 진지도 모르고 하늘을 우러러 호곡(소리 내어 슬피 욺)해 울면서 바람 부는 대로 정처 없이 배에 실려 떠내려갔다.

한편으로 아랑은 부전이를 달래서 개루의 침실로 들여보낸 뒤에 집을 벗어나 동리 집 처마 끝에서 밤을 지새우고, 날이 훤하기 전에 도미의 소식을 듣기 위하여 대궐 도편수를 찾았다. 도미는 아직 대궐 안에 무사히 있다는 소식을 듣자 적이 가슴을 가라앉힌 지 반나절이 못 돼서, 대궐에 들어갔던 도편수에게서 아랑에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기별을 전해 왔다.

도미를 두 눈알을 뽑아 광나루 강물 위에 내쫓았다고…….

그리고 아랑이 자기 집에 있으면 자기 도편수까지 벌을 당할 테니, 속히 다른 데로 피신을 해 달라는 부탁까지 있었다. 아랑은 정신이 아찔했다. 그러나 한시를 지체할 때가 아니었다. 앞뒤를 헤아려 보지 않고 눈물을 머금어 광나루 강가로 쫓아갔다. 젊은 여자, 더욱이 아랑같이 뛰어나게 예쁜 여자가 사람의 눈에 유표하게(두드러지게) 띄기는 쉬운 일이었다. 아랑은 강가에서 뱃사공 한 사람을 붙들고 도미의 소식을 다 캐어묻기도 전에 먼저 미리 배치해 두었던 개루의 군사에게 붙잡혀 버렸다. 앙탈도 소용없었다. 뿌리치고 달아나자니 힘이 모자랐다. 아랑은 이내 대궐로 끌려갔다.

으리으리한 대궐, 화려한 전각 안에 아랑은 개루를 다시 대하게 되었다.

“네가 네 죄를 알겠니?”

개루의 목소리는 위엄스러웠다. 아랑은 똑바로 개루를 쳐다봤다. 눈에는 잠깐 살기가 떠돌았다. 남편 도미의 눈알을 뽑힌 생각을 하니 아무리 단단한 마음씨언만 다리 팔이 가늘게 부들부들 떨린다. 순간 아랑은 얼른 분한 생각을 물리쳤다. 입 언저리에는 강잉히(어쩔 수 없이) 미소를 띠었다.

“죽을 때라 잘못했사옵니다.”

가늘게 가늘게 떨리는 듯이 들렸다. 개루는 다시 아랑을 대하고 보니 지난밤에 속았던 분한 생각도 봄눈 슬듯 스러졌다. 오히려 속았기 때문에 아랑이 더 귀여웠다.

“네 남편은 대궐 역사를 잘못 거행했기 때문에 나라 죄를 얻고 형벌을 당해서 바다 밖으로 내쫓겼다. 앞 못 보는 장님이 산다면 며칠이나 살겠니? 아마 오래지 않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게다. 아랑아, 그래도 내 후궁이 되기 싫으냐?”

“인제는 남편도 없고 의지할래야 의지할 곳도 없습니다! 간밤 모시지 못하였지만, 오늘 이 모양이 된 뒤에야 어찌 다시 대왕의 말씀을 거역하오리까.”

소근소근 하소연하는 듯 대답하는 아랑은 방울방울 눈물까지 흘렸다. 개루의 넋은 아랑의 탯거리(태, 맵시)에 그대로 녹아 사라질 듯하다.

“물러가 있거라!”

궁녀 한 사람에게 호위되어 기운 없이 초연히 돌아서는 아랑의 뒷태도에는 만 가지 수심이 안개 끼듯 어리었다.

5

향기로운 젖물에 목욕하고 은마구리한(은으로 양쪽 끝을 덮은) 장도칼로 손톱 발톱을 곱게 다스린 아랑은, 이 날 밤에 무명 옷을 벗어 버리고 칠보 화관 족두리에 궁녀의 복색(옷의 꾸밈새와 빛깔) 화려한 당의(저고리 위에 덧입는 여자 예복)를 입고 나인(궁녀)에게 인도되어 궁중 깊고 깊은 복도를 거쳐 개루의 침실로 들어갔다. 화려한 연둣빛 당의, 찬란한 붉은 치마에 금나비가 바르르 떠는 화관을 쓴 아랑의 때깔은 과연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이 어여쁘다. 관음 보살보다도 더 고왔고, 옥계(옥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의 선녀보다도 더 예뻤다. 대혼(임금이나 황태자의 혼인) 촛불을 밝히고 비스듬히 안석(방석)에 의지해 있던 개루는 자기도 모르는 김에 몸을 일어(일으켜) 아랑을 맞았다.

궁녀는 물러가고 인적은 고요했다. 홍공단(붉은 빛깔의 공단) 두 채 이불이 화려한 봉베개(봉황이 수놓여져 있는 베개)를 얹고 서리서리 펼쳐졌다. 개루는 벌떡 일어나 그림같이 서 있는 아랑의 손길을 탁 쥐었다.

“앉어라!”

아랑은 개루에게 손을 맡긴 채 보시시 앉는다.

“아직도 도미의 생각이 나니?”

“오늘 밤부터는 대왕의 사람이온데, 그까짓 눈먼 천한 백성을 생각하면 무얼 합니까?”

아랑의 볼이 바시시 기어지며 방싯 웃음을 머금었다. 하얀 이빨이 꽃판 같은 입술 밑에 쫙 드러난다.

이튿날 개루와 아랑은 느직하게 침실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개루는 아랑과 사이에 한 금을 넘지 못했다. 마침 수라(임금에게 올리는 진지)가 들어왔다. 아랑은 빈이 된 듯 모든 거행을 정성껏 받들었다. 밖에 있는 궁녀들이 아랑을 정말 빈으로 받들었다.

해가 기울고 다시 밤이 되었다. 아랑은 침실에서 여전히 개루를 곰살궂게 받들었다. 정말 아내가 남편을 대하듯이……. 그러나 몸때는 여전히 맑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났다. 다만 아직 한 금을 넘지 않았을 뿐, 모든 것을 다 개루에게 맡긴 아랑의 다른 뜻 없는 진선 진미한 태도는 개루의 온갖 경계하는 마음을 차츰차츰 풀어지게 하고야 말았다. 개루는 손가락을 꼽아 다만 아랑의 몸 맑을 날을 그 날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랑이 개루의 침실에서 묵은 지 이레째 되는 날 밤. 아랑은 개루의 이불 속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벗어 놓은 치마와 저고리 대신 개루의 옷과 바지를 입었다. 머리에는 화관 대신 꿩털 꽂힌 관을 얹었다. 개루가 나다닐 때 군사에게 보이는 병부(왕과 병권을 맡은 지방관 사이에 미리 나누어 가지는 신표)까지 단단히 주머니 속에 넣었다.

아랑은 몇 번인지 개루의 코 고는 소리를 시험해 보고 방문을 연 뒤에 토깽이처럼 바시시 빠져 나갔다.

이레를 두고 보살펴 익혀 둔 길이라 막힐 것이 없었다. 지밀문(임금이 거처하는 곳의 문)을 벗어난 아랑은 마지막 대도문(큰길로 나가는 문)에 이르자 파수지기 군사에게 말없이 병부를 내보였다. 대궐 문이 열려졌다가 스르르 닫혔다. 마침내 아랑은 세상 구경을 다시 하게 되었다. 아랑은 두 주먹을 쥐고 광나루로 달음질친다.

나룻가에서 아랑은 또다시 병부를 보이고 사공을 재촉해서 배 한 척을 얻었다. 아랑은 이레 전에 남편 도미가 떠내려간 곳을 따라 물결이 흐르는 대로 배를 저어 흘러간다.

6

해가 훤히 동천 하늘에 떠오르기 시작할 때 아랑의 배는 양화도를 지났고, 한낮이 겨워서는 강화도 갑고지물에 닿았다. 군데군데 갯가 사람들에게 이레 전에 지나간 눈먼 도미의 종적을 물으니 도미는 강화 쪽을 향하여 흘러간 것이 분명했다. 아랑은 뭍에 올라 또다시 사공들을 붙들고 눈먼 도미의 지나간 방향을 물으니 한 사람의 사공이 며칠 전에 눈먼 거지 장님을 보았다 한다.

아랑의 가슴은 탈 듯이 조여졌다. 뒤에는 개루의 쫓는 군사가 반드시 있을 것이 무서웠다. 앞으로는 얼른 도미를 못 만나는 것에 마음 졸였다.

아랑은 또다시 배를 저어 승천포로 흘러갔다. 해는 다시 강 너머 사산으로 꺼지고 첫 가을 바람은 우거진 갈대 잎을 휘날릴 때, 승천포 포구 앞에는 갈대 피리를 불고 앉은 거러지 장님이 있었다. 아랑은 가슴이 출렁 떨어졌다. 배를 버리고 단숨에 땅 위로 뛰어올랐다. 구슬피 해 떨어지는 서풍에 갈대 피리를 불고 앉았는 장님 거러지는 갈 데 없는 자가 남편 도미였다.

“도미…….”

아랑은 도미를 껴안았다. 구슬피 피리를 불고 앉았던 도미는 귀 익은 목소리에 놀라 알맹이 없는 눈을 휘번득거렸다.

“도미…… 나야. 아랑이야!”

아랑의 두 뺨엔 더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무어 아랑!”

도미는 더듬더듬 아랑의 몸을 찾았다. 도미가 아직도 촉각의 기억이 새로운 아랑의 손을 잡았을 때,

“어떻게 찾아왔소! 그래도 나를 안 버렸구려!”

도미는 겨우 한 마디를 마치고, 동자 없는 눈으로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다.

몇 달 뒤에 백제 서울에는 아랑의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아랑이 눈먼 도미의 손을 이끌고 원수의 백제 땅을 영영 버린 뒤에 거러지가 되어 고구려 땅으로 들어갔다는 구슬픈 이야기가 떠돌았다.

 

_200620901 박종찬

출처 : 캐릭터 콘텐츠 디자인
글쓴이 : 200620901박종찬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