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四)은 남녀 교합시 서있는 남근을 두르는 여음
(하나 둘 셋...열의 뜻을 밝히는 [진본 천부경] 해독 한배달 강의 12)
1. 신지녹도문 [진본 천부경] 넷의 그림과 뜻.
먼저 해독 했던 글 들을 다시 참고한다.
햇빛의 뜻을 가진 하나의 '하'
햇빛이 누리에 내리는 뜻을 가진 하나의 '나'
누리에 내리는 햇빛을 땅이 두르는 뜻을 가진 '둘'
빛이 누리에 둘리워 사내를 세우는 뜻의 ' 셋'
이상 우리 ㄱ, ㄴ, ㄷ... ㅎ의뜻으로 풀어본 우리말 뿌리에서 하나, 둘, 셋은 하늘과 땅과 사내인 이유를 설명하였으며, 이것을 금문으로도 맞추어보았다. 그러므로 '사람(사내)'이란 본질은 '하늘의 정신(혼)을 물질인 땅이 둘러서 세운 것'이라 했으니 사람이란 언젠가는 이 옷을 벗을 때가 되면 그 옷은 왔던 땅으로 돌려보내고 정신은 왔던 하늘로 올라가 영원 불사하는 존재라 했다.
그렇다면 번식의 원리인 하늘과 땅은 사내만 만들어 땅 위에 두고 번성하라 했을까? 창세기에 보면 여호와는 아담을 만든 다음 그 갈빗대를 뽑아 이브를 만들었다 했는데 이는 잘못 번역된 말이고 그리스 어에서는 갈빗대는 ‘곁’ 과 같은 글자였음으로 아담의 곁에 이브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신지녹도문 [진본 천부경]에서는 하늘과 땅이 사내를 만들고 다음 남녀 교합시 그 사내의 숫를 두르는 계집의 여음을 만들었다는 말이니 셋 다음에 나오는 신지의 글자는 틀림없이 '넷'일 수밖에 없는데, 다음 신지 글자가 왜 '넷'인가를 설명한다.
사내의 숫을 두르는 뜻을 가진 신지녹도문 [진본천부경]의 '넷'
우선 이 글자를 해독하기 전 먼저 말한 신지녹도문 [진본 천부경] ‘둘’을 다시 보자
둘
이 글자는 '山 아래 그 산을 휘돌아 두르고 있는 개울, 즉 내(川)'의 그림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山과 내'가 있으니 이는' 땅인 누리, 즉 응달 양달 하는 '달‘ 을 말하고 이 ‘달’ 은 아래아점 달 이므로 ‘둘’ 도 되며 그 둘은 ‘두르다’ 도 된다
그런데 이번 '넷' 에서는 그 둘 위에 山은 없고 그 산을 두르던 '내'만 있으니 이것은 말 그대로 두르는 '내(川)'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내'가 왜 '넷'이 되며, '넷'은 우리말로 무슨 뜻인가를 설명해야 한다.
2. 천부인 ㅇ ㅁ ㅿ 으로 본 넷의 뜻과 증거.
우선 넷의 우리 뿌리말 을 알기 위해 [천부인]으로 만든 우리의 자음 'ㄴ'속에 어떤 뜻이 들어있는가를 다시 한 번 보자.
한 말을 자꾸 되하는 이유는 이렇게 신경을 써서 읽어야 하는 글은 한 문장이 지나면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 자음 'ㄴ'속에는 '누워있다'라는 뜻이 들어있다.
그래서 'ㄴ'으로 시작되는 우리말은 모두 '내려오다, 누워있다'는 뜻의 말뿐이다.
* 누에 : 누워있는 벌레
* 눈(目) : 얼굴에서 누워있는 부분
* 눈(雪) : 비는 오는 즉시 흘러버리지만 눈은 그대로 누워있다
* 누리(세상) : 누워있는 대지
* 내(川) : 위에서 말한 '내'도 누워서 흘러내린다.
* 누님 : 성기가 누어있는 동기간이 '누' 이고 ‘님’은 존칭이며
* 누이 : ‘이’는 지칭 대명사 이고
* 누나 : 눈아 > 누나 로 맏이(兄)나 아우(弟)로 표시되는 형제, 즉 사내의 성기(남근)는 서있지만 '누이, 누나'의 성기는 누워있다.
(이하 생략, 자세한 설명은 글쓴이 또하나의 졸저 [천부인 ㅇ ㅁ ㅿ 의 비밀]
그런데 여기서 형제나 누이, 누나는 꼭 자기 형제와 자매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결혼제도가 없었던 옛날에는 결혼제도가 있는 지금과 같이 나와 내 마누라 사이에 난 아이만이 내 아들딸이 아니라, 그 부족의 씨로 누구와 관계를 해서 아이를 낳았건 그건 다 무리의 아들(庶子)이고 무리의 딸이므로 형제자매란 꼭 같은 부모의 소생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했다.
여기까지 읽느라고 수고 하신 독자님들을 위하여 말을 잠시 옆으로 돌려 재미난 이야기를 해 보자. 다음 말은 낙빈기가 중국 역사를 말 하는지 우리 역사를 말 하는지는 모르나 고조선 때 들어와서는 이미 상류층에서는 결혼제도 같은 것이 있긴 있었던 모양인데, 낙빈기의 금문 해석을 보면, 하느님인지, 단군으로 추정되는 염제신농은 치우와 탁록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황제헌원의 고모와 딸을 각각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여 황제 집안의 사위가 된다. 그런데 황제 또한 신농의 고모와 딸을 각각 첫째와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이니 양쪽 집안의 아들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장인과 사위가 된다. 꼭 빈라덴과 알카에다 같은 사이라 하겠다.
이런 제도를 '양급제(兩級制)'라 하는데, 이는 아버지나 아들 간, 또 형제나 조카 등 두 사람이 역시 고모와 딸 등 두 여자와 결혼하여 한 집을 이루는 제도라 한다.
또 중국 역대 왕 중 성군이라는 요(堯) 임금과 순(舜)임금은 고조선 제 6 대, 7대 임금일 수도 있다는데 그들의 사이를 보면 순임금은 그 형인 오회와 고조선 제 4대 임금으로 추정되는 제곡고신의 딸 아황(娥皇)과 요임금의 딸 여영(女英)과 공동 남편이 된다. 그러니까 순임금은 형 오회가 장가갈 때 데리고 간 데린님(도련님)이며 형인 오희와 공동 남편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요임금은 자기의 딸 오희가 낳은 아들, 그러니까 외손자 육종(陸終)을 자신의 작은 부인이 낳은 딸 안(安)과 결혼시키어 오희의 부자를 자신의 사위로 삼는다고 했다.
순임금은 자기의 딸 사모신(司母辛)을 을 첫 조선 8대 임금으로 추정되는 우(禹)임금과 결혼시키는데, 순임금이 양급제인 모계사회에서 일부일처인 부계사회 같은 것으로 가족제도를 제도를 바꾸려 하자, 이 딸은 그 고모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남편인 우임금을 왕으로 세우고 아버지 순임금을 실각시킨다는 것이다.
이 반란은 순임금이 변방의 제후국으로 순행을 나가고 궁궐이 비어있는 사이에 일어나는데, 결국 순임금은 지금 관광지인 계림의 산속으로 들어가 최후를 맞고, 이 소식을 들은 순임금의 부인들, 즉 아황과 여영은 호남 동정호에 있는 군산이라는 섬에서 물에 빠져 자살한단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중국의 성군으로 뽑는 요순(堯舜)의 기록은 공자님이 윤색한 것이라는 것이 낙빈기의 금문 해독 결과이고, 글쓴이가 아직 거기까지 분석은 못했지만 인류학자 모르간이 말하는 두 사람의 남편과 두 사람의 부인이 결혼하는 '양급제(兩級制, Ppnalua)'는 두 집안이 얽히고설킨 결혼제도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낙빈기의 말에서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있다. 즉 신라시대 초기에 박혁거세가 타성에게 왕위를 양위하거나, 노례왕(弩禮王) 편에서 노례왕이 처음에 그 매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사양하니 탈해는 “대개 덕이 있는 이는 이가 많으니 마땅히 잇금으로 시험해봅시다”하고 떡을 물어 시험해보는 장면의 처남매부지간이 어쩌면 이런 식의 형제가 되는 근거가 될지도 모른다.
이런 나이 먹은 사람과 나이 어린 사람이 쌍으로 결혼한다는 것은 어쩌면 생식을 본능으로 하는 고대 사회에서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즉, 젊은 사내와 나이 많은 사내, 그리고 나이 적은 여자와 나이 많은 여자의 성적 선택이나 경쟁을 통하여 우수한 후손을 얻으려는 목적 같은 것도 있었을 것이고, 나이 많은 상대가 나이 적은 상대를 성적으로 성숙시키는 계기도 될 수도 있으며, 좀 비속하게 말하면 늙은 여자도 어린 사내와, 늙은 사내도 어린 여자와 늦게까지 성생활을 할 수도 있는 방법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현재 우리의 상식으로 犬판인 결혼제도와 성생활 풍습은 불과 50 여 년 전 만해도 우리와 동족인 에스키모들한테도 남아 있었다고 했다. 즉,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백야 때 에스키모들은 여기 저기 얼음 위에 얼음움막인 이글루를 짓고 흩어져 살다가 심심하면 개 썰매를 타고 형제나 동족이 사는 이웃마을 집으로 놀러간다. 그때 손님을 맞이한 주인이 손님에게 가장 먼저 대접하는 것은 자기의 부인의 제공인데, 이것이 예의이고 만약 손님이 이것을 거절하면 자신을 무시했다 하여 큰 싸움이 벌어진다고 했다.
그때 물론 그 남편이나 아이들은 이 장면을 구경한다. 왜냐하면 이글루란 방이 하나밖에 없는 얼음움막이기도 하지만, 생명을 창조하는 행위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듯 음란한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성스럽고 신성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성행위가 부끄럽다고 생각하게 된 동기는 지나인들이 성행위를 쾌락으로 즐기려는, 즉 유희 화하면서부터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것을 현대 우리의 잣대로 재서 미개한 행동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그 후 만약 그 부인이 임신하면 누구의 자식인가를 따지는 것은 참으로 무의미한 일이다. 왜냐하면 형제 등 동족의 씨는 모두 자신들의 씨이기 때문이라 했다. 또 지금도 티벳 부근의 오지나 파키스탄 부근의 오지 마을의 우리와 같이 몽골반점이 있는 자들이 형제가 한 여자를 데리고 사는 풍습이 남아있는데, 최근 서방기자가 티벳의 한 재판소에서 취재한 보도에 의하면, 티벳의 한 부인이 이혼소송을 해왔는데 그 사유는, 그 여인은 그 집 형제들 중에 셋째를 좋아하여 그 집 형제들과 결혼했는데 그 셋째가 외국으로 돈 벌러 가서 몇 년째 오질 않으므로 이혼을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간 그 집 형제들과 관계해서 낳은 아이들은 누구의 자식인지도 따질 필요가 없기에 알 수도 없다는 것이다. 또 지금도 아마존강 유역 나체족이나, 마사이 부족들 중 일부는 아무리 부인들이 많아도 소와 양 등으로 15~6세 되는 처녀들을 사서 부인을 만들 수 있는데, 그때 먼저 부인들은 새로 부인이 들어오면 협동하여 집을 지어준다. 뭐 집이라야 소똥 등을 말려 만든 벽돌 몇 개를 쌓고, 위는 나뭇잎 등으로 엮어 만들고, 출입문은 거적 데기를 쳐놓는다.
어느 날 남편이 새 신부와 관계하려고 창을 들고 그 집을 찾아가는데, 만약 그 집 문전에 이미 어느 놈의 창이 꽂혀 있으면 신랑은 그 집 방문을 포기하고 창이 꽂히지 않은 마누라 집을 찾아간다. 물론 남편도 아내의 집에 들어갈 때는 그 문전에 자기의 창을 꽂아놓는다. 즉, 어떤 여자를 찾아가며 창을 문전에 꽂아두는 이유는 '나는 이미 이 집 여자와 관계를 하고 있으니 누구든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이다. 물론 거기서 낳은 아이가 누구의 아이냐를 따지는 것은 참으로 무의미하기에 모두 자기의 자식으로 기른다.
이것이 만약 현대 문명 세계의 일이라면 자기 아내가 딴 사내와 간음했을 때 불타는 증오와 질투심으로 그 문 앞에 꽂혀있는 창을 뽑아 당장 연놈들을 찌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무시하고 경멸하는 소위 미개인들은 절대로 개인 이기주의가 아닌 자기 집단이 바로 자신이므로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그 짝에게까지도 개체적 사고방식이 없다.
우리가 간혹 '도전 지구탐험' 같은 프로에서 미개한 오지인의 생활을 볼 때 그들은 정말 자기 자신이란 없이, 즉 개인 이기주의적 사고가 없이 부족주의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으로 볼 때 위에서 말한 낙빈기의 양급제는 전부 거짓말 이라고도 할 수 없고 따라서 '누이, 누나'는 꼭 내 자매만이 아니라 '부족의 씨 중에 여자'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위에서 말한 여자라는 '누나'나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넷'이 어떻게 다른지 어떤 변천과정을 겪는지 알아보자.
누워있는 'ㄴ'의 뜻은 내려와 눕는 것이니 하늘에 누워있던 구름이 내리는 것, 즉 비도 '나린다'라고 하고, 우리말에 약방의 감초처럼 항상 붙는 접미사 '이'가 붙어 내(川)가 된다고 했다. 또 해도 하늘에 누워있고 햇빛은 나리는 것이니 세종 100 년 후에 써진 훈몽자회만하더라도 '日'이 '나 일'이었으며, 지금은 '날 일'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 '날'이 진화하여 하루로 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내려와 누어있는 뜻이 있는 ㄴ 이 왜 해도 되는가? 이는 해는 햇빛과 같은 말이고 햇빛은 내려와 누리에 누어있기 때문이다. 또 이 모든 것의 최고인 '해'가 나가 되다 보니 [훈몽자회]를 보면 '日은 君王之表'라 하여 임금의 뜻도 있다. 즉 태양을 상징하는 '임금'을 '나'라고 했던 것인데, 임금이란 '사내들의 대표자'이다. 그러므로 임금만이 '나'라고 했고 일반 사내들은 감히 '나'라고 하지 못했으며, 이 말은 지금까지 전래되어 어른 앞에서 자신을 '나'라고 했다가는 후레아들놈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그때 사내들은 자신을 나타내려면 저쪽 이라는 '저' 나 '아롬'이라고 했고 이는 한자로 私자 이며, 그래서 [훈몽자회]에는 私자가 '아롬 사' 자 이고 이 '아롬', '어롬'은 '성교'를 뜻한다. (이 부분 자세한 설명은 역시 [천부인의 비밀] 에서 “아름답다는 섹스를 잘 할 것 같다” 는 뜻 참조)
따라서 지금 남의 사생활을 간섭할 수 없다는 말은 남이 '성교하는데 간섭 할 수 없다'는 뜻이고, 이는 짐승인 개(犬)도 치열한 암컷싸움을 하다가도 일단 교접에 성공하면 암컷과 붙어 떨어지지 못함으로 한동안 부자유스러운 상태가 되었을 때, 사람 같으면 그 연적이었던 놈을 해칠 수도 있는데 다른 개의 수컷들은 해치지를 않고 그냥 침이나 흘리며 구경만 하고 있으니, 인간이 자신의 연적을 질투하고 남의 사생활, 즉 성교에 관여한다면 개만도 못하다는 이야기도 된다.
다시 본론으로 와서 이렇게 사내들의 대표인 임금이 '나'이므로 이 사내들의 상대는 '너'라고 했다. 이 '너'에 다시 우리의 감초격 접미사 '이'가 붙으면 '네'가 되고, 여기에 다시 사람으로 성립을 뜻하는 'ㅅ'이 붙으면 '넷'이 된다. 따라서 '넷'이란 '계집을 세우다'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글쓴이의 이 우리의 뿌리 말 풀이도 믿지 못한다 할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이 '너'가 '계집'이라는 근거를 [사서삼경] 등 경전으로 보자.
계집이 ‘너’라는 증거를 보자면 공자님의 [논어]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즉, [논어]에서 ‘너’ 는 꼭 여(女) 자로 표시되고 있으니, 그때만 해도 '겨집'과 ‘너’를 같은 글자로 썼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공자님이 없는 말을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먼저 제시 했던 금문 女, 母 그림에서 金文 1, 2, 3 등은 모두 유방까지 달린 계집이고, 갑골문 4 는 젖꼭지까지 그려놓았으므로 母 자이다.
즉, 女자와 母자는 같은 글자를 썼으되 단 젓꼭지가 있느냐 없느냐 뿐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에로틱한 것은 지금도 쓰고 있는 삼수변에 계집녀 자를 쓰는 '너 여(汝)' 자 이다. 그렇다면 왜 물가에 있는 계집이 '너'인가?
이 금문글자를 이번에는 甲金篆隸大字典 四川辭書出版社에서 본다
여기에 보면 지금 우리가 상대를 말할 때 쓰는 너란 글자는 분명 '냇(川)가의 겨집'이며, 이는 '개울가의 벌거벗은 계집을 즉석 처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너'에 먼저 말했듯이 우리의 감초격 접미사 '이'가 붙으면 '네'가 된다.
다음 '네'가 '여자'로 쓰이는 예를 보자.
우선 하회 탈춤에서 양반과 파계승과 상놈이 한 각시를 가지고 다투는데, 이 각시의 이름이 '부네'이다. 또 배뱅이굿에서 등장하는 여인들의 이름이 '세월네', '네월네'이고, 지금도 시골 등에 남아있는 말이지만 '돌쇠네'니 '삼돌네'니 하는데, 이는 돌쇠나 삼돌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낙'을 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1940년 경 일제가 창씨개명하기 전까지의 여인네 이름은 '똥네'니 '분네'니 '순네'니 했는데, 이것이 호적에 올려 지면서 한자로 똥네는 분예(糞禮)로, 분네는 분예(分禮)로, 순네는 순예(順禮), 또는 순녀(順女)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 '너', '넛'이 '여자'라는 말을 보강하는 강력한 증거 하나를 더 제시하면, 지금도 우리 국어사전에(1978년 양주동 책임감수 민정사 발행 현대국어 대사전) '넛손자'라는 말이 있다. 이 '넛손자'란 '누이의 손자'를 말하는데, 그렇다면 누이의 아들은 '넛아들'이 될 텐데 우리 사전에는 이 '넛아들'이란 말은 없고 '생질(甥姪)'이란 말만 남아있다.
이는 벌써 우리 순수한 말이 한자에 오염됐다는 말이고, 하여간 '넷'의 어근 '넛'은 '누이이면서 '계집을 세우다'로 본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셋'에서 사람, 즉 사내를 만들어주시고 사내만 있으면 안 되니까 그 사내 숫의 집인 계집도 만들어주셨다는 말인데, 이것이 얼마나 인간에 대한 축복이며 고마운 일인가?
꼭 [창세기]를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 하느님의 교훈인 이 신지녹도문 [진본 천부경]이나 [창세기]는 모두 우주의 섭리를 아는 성인들의 말씀이니 대동소이할 것은 뻔한 이치다.
그렇다면 과연 '넷'이 '겨집, 여음'을 말하는지 우리 조상이 만든 원시 한자 금문으로도 한번 보자.
3. 문금으로 본 四의 뜻과 증거.
四자
우리 조상들이 그려쓰던 그림글자 금문도 막대 네개가 四이기도 하지만 設文古文은 여음에서 아기가 나오는 통로까지 그려 있으며 그 옆 금문3 에 서는 여음 그림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기 때문에 四는 여음그림이다.
이상 하느님의 교훈 [진본천부경] 하나 둘 셋...열중 ‘넷’의뜻을 마치며 다음 ‘다섯’ 부터는 출판사의 사정도 있으니 유명서점에서 책을 구입해 보시라.
글쓴이가 이 하느님이 내려주신 [진본 천부경] 이란 최치원의 81 자가 아니고 바로 하나 둘 셋 ...열이라 하고 그 뜻을 설명하는 글을 올리자 어떤 읽는 이 들은 뭐 그까짓 하나 둘 셋 ...열의 뜻을 알아야 뭐한다고 글은 올리느냐고 따리를 붙이지만 피의 전쟁이 계속되는 지금 부처나 예수님 말씀은 진정한 평화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방법도 없고 또 요즘은 그저 자신에게 복을 내려 달라는 기복종교로 전략하고 말았는데 우리 하느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진본 천부경]하나 둘 셋 ...열은 우리가 이 땅에 태어진 이유와 부지런히 일해서 부모 처자식 잘 돌보고 아홉이라는 씨족의 울타리가 완성 되면 열로 열고 나가 타 종족과 피를 섞어 다문화 가정을 이루고 영원히 평화를 이루라는 말씀인데 이는 알고 있지 못하고 그저 숫자로만 알고 있기에 지상 최고 평화 경문인 이 하나 둘 셋 ...열의 뜻을 밝히는 것이다.
또는 http://cafe.daum.net/chunbuinnet -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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