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란 말은 우리가 잘알고 있듯이 배달국의 14번째 환웅이신 자오지천황의 별명으로써, 치우란
뇌성벽력을 일으키며 비를 내리게 하여 산과 강을 크게 변화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치우란 벼슬이름으로써, 배달국 치우천황이신 자오지 천황 시대로부터 비롯하여 단군조선에 이르기까지
병권을 관장하는 병부의 우두머리 벼슬 이름으로 쓰이게 됩니다.
그리고 치우천황에게는 치우비라는 용맹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치우비 장군이 황제헌원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울 욕심으로 너무 성급히 공격을 감행하다가 전투중에 전사하게 됩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자신들 조상의 부끄러운 패배의 기록을 감추기 위하여 `치우를 잡아 죽이다.`라는
표현으로써 마치 치우비 장군의 전사를 치우천황이 전사한 것인 양 거짓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결국 치우천황은 황제와의 72회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고 지나(중국이라하면 틀림 지나족이 맞음)
서방족의 우두머리인 황제 헌원의 항복을 받아들여 제후로 삼아 동방 문명을 아낌없이 전수해 줍니다.
달마가 치우천황의 자취가 서려있는 이 동굴에서 수행한 의미는 무었일까요.
석가모니 불법의 정통 법통을 이어받은 달마는 석가모니가 수행한 설산이 히말리야 산이 아니라 백두산
임을 알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바로 자신의 도의 뿌리가 바로 이 동방 땅의 국유현묘지도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하는 2001년 2.3월호(통권53호)에 실린 글로써, 바로 그 치우천황의 자취가 역사속에 남아있는
치우천황의 흔적을 알아볼 수 있는 글이자 증거라고 판단됩니다.
글 : 네이버 치우천황 카페(http://cafe.naver.com/jaoji.cafe)
송호국
-이하 자료출처 : 한배달 2001년 2, 3월호 (통권 53호)
< 이규행이 쓰는 달마이야기 > "달마동굴의
내력"
.
소림사의 사적기(寺跡記)에 보면
오유봉에 있는 ‘치우동굴’이
‘화룡동굴’로 바뀌고
그것이 다시 ‘달마동굴’로 불리게 된 내력이 자세히 쓰여 있다.
‘달마동’ 또는 ‘달마동굴’이란 이름은
달마가 소림사를 떠난 뒤에 붙여진 것이고
달마가 9년 면벽할 당시에는 ‘화룡동굴’이라 불렸다.
이 ‘화룡동굴’이란 이름은 달마가 동굴을 찾아든 고사와 이적(異蹟)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전까지는 ‘치우동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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