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장과 정신과의 관계
'물리학의 도'를 쓴 카프라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이 책을 쓰게 된 동시는 5년 전에 겪은 아름다운 체험 때문이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의 어느날 오후, 나는 해변에 앉아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내 호흡의 리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나 자신을 둘러 싸고 있는 일체의 것이 장엄한 우주적 춤을 추고 있다고 느꼈다. 근처에 있는 모래나 바위, 바다와 공기가 진동하는 분자와 원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분자나 원자가 다른 입자들을 생성·소멸시키는 부단한 상호 작용을 거듭하고 있는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물리학자인 나는 익히 알고 있었다. 또 지구의 대기는 마치 소나기 같은 우주선의 폭격을 끊임없이 받고 있으며, 고에너지 입자인 우주선이 대기층을 통과할 때 무수한 충돌을 반복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고에너지 물리학 연구에 종사한 나로서는 매우 익숙한 현상이었지만 그 순간까지는 그래프나 도식, 또는 수학 이론을 통한 체험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해변에 앉아 있을 때 나의 이전 경험들이 싱싱한 생기를 띠면서 되살아났다. 나는 그때 수많은 입자들이 생성과 소멸의 율동적인 맥박을 되풀이하면서 우주로부터 쏟아져내려오는 에너지의 폭포를 보았던 것이다. 나는 또 다양한 원소들의 원자와 내몸의 원자들이 함께 에너지의 우주적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리듬을 느꼈고 그 소리를 들었으며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 현상이 바로 인두교도가 숭배하는 춤추는 신 '시비의 춤'인 것을 깨달았다." 신과학을 주창하는 자들은 이런 경험은 단순한 감정이나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때까지자연을 분석해 온 서구식 논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고로만 파악될 수 있는 자연의 새로운 분야라고 간주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차원에서, 파장과 정신과의 관계
물에도 과연 마음이 있는지를 생각해 본 사람이 있다.
일본의 에모토 마시루(江本勝)는 물의 결정이 외부 환경에 따라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일그러져 나타난다고 했다. 그는 적은 양의 물을 접시에 떨어뜨려 영하 20도 이하 냉동실에 넣고 3시간 정도 얼린 후 고성능 현미경으로 찍었다. 그 결과는 어떤 음악이나 어떤 말에 따라 물의 결정이 다르게 나타났다고 한다. 예를 들면, 베토벤 전원 교향곡을 들려준 결정은 밝고 아름답게 정돈된 모양이지만 분노와 반항의 언어로 가득찬 헤비메탈 곡은 제 멋대로 깨진 형태로 나타났다. 또 '감사'나 '사랑' 같은 말을 들려주면 물의 결정이 아름다워지는데 반해 욕설을 들려주면 결정이 흩어지고 찌그러졌다. 그는 뿐만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채취한 물 결정을 보여 줬는데 대도시의 물에는 아예 결정이 형성되지 않았는데 이는 지나친 오염과 염소량 때문에 물이 그만큼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반면에 벤쿠버나 코펜하겐, 취리히의 물은 결정이 아름다웠다. 그의 주장은 인간의 생각과 의식이 인간의 몸에만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물질 세계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데 초점이 있다.
전체를 가지고 부분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신과학으로 나아가는 힌트가 된다.
그런데 이 정보를 가지고 신과학을 주창하는 자들이 있다.
기에는 원적외선, 초저주파, 생물광자 같은 것으로 측정되는, 즉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물리적 수준의 기가 있는가하면,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초광속의 싸이Psi 에너지로서의 기가 있다. 싸이 에너지는 사람의 마음 상태, 즉 의식과 이미지에 좌우된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흔히 초현상이라 부르는 텔레파시, 염력, 초감각적 인식(ESP) 등과 관련 있는 에너지를 싸이 에너지라 한다. 물리적 수준의 에너지는 인체의 체액(진피 결합 조직과 각 기관의 결합조직의 물이 많은 층) 속을 일정한 방향과 속도를 지니고 흐고 있다. 이러한 에너지의 흐름을 제어하여 방향과 속도를 조정, 어떤 특정한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 경락계이다. 이런 에너지는 일종의 물리화학적인 에너지라 할 수 있는데 체액 속 경락을 따라 어떤 기능을 수행하며 흐는 것이 특징이다. 흔히 기공사가 에너지를 보낸다고 할 때 그 범위는 10m 이내이며, 체내에 들어간 그 에너지는 1초에 20cm 가량의 속도로 이동한다는 것이 중국에서 실험한 결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싸이 에너지는 초광속으로 전달되며 타키온과 마찬가지로 빛의 속도의 10억 배도 넘는 무한대의 속도로 전달된다고, 세계 기연구자들은 추정한다.
현대 중국에 어떤 초능력는 몇 가지 신기한 기능력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물질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그들은 부서진 물품을 원래 모습으로 복원시키며 뚜껑이 닫힌 병속의 약을, 병을 깨지 않은 상태에서 깜쪽같이 밖으로 꺼내기도 하고, 갈기갈기 찢긴 나뭇잎을 원래대로 복원시키는 능력을 보여준다. 또 몸 안에 있는 종양을 들어내 병을 고치기도 한다. 두 번째는 염동(PK)능력으로, 이는 수천 리 밖에 두고온 서류 봉투를 순간적으로 이동시키거나 자동차를 다른 지점까지 공간 이동시키는 능력을 말한다. 또 하나는 소생 능력으로, 죽은 병아리를 원래 상태로 살려내는 것, 군밤을 다시 생밤으로 되돌리는 것, 삶아서 붉게 익힌 새우를 투명한 생새우로 다시 살려내는 것, 볶은 땅콩을 생땅콩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볶은 땅콩으로 되돌리는 것 등이 이에 속한다.
기와 관련하여 또 한가지 중요하게 알아야 할 것은 기와 의식의 관계이다. 기라는 파동을 받아드릴 때 파장을 맞추는 것이나, 혹은 상대방에게 기하는 파동을 보낼 때 파장을 맞추는 것 모두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진언이나 만트라를 회우면 뇌세포의 기능 단위인 칼럼군이 차례로 흥분하게 되는데, 이처럼 흥분할 때 나타나는 컬럼군의 패턴에 따라 어떤 성질의 기를 낼 것인가 하는 것이 결정된다. 목적에 맞는 진언과 만트라가 각각 정해져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기의 파장을 맞추는 것이 의식임을 분명히 알게 되지만 의식불명의 환자를 원격치유로 깨어나게 하거나 잠자는 환자에게 일방적으로 기를 보내 치유하는 실례도 있음을 고려하면, 뇌의 활동 전체가 의식에 대응하는 것은 아니며, 의식과 관계없는 뇌의 활동도 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우주 공간에 생명 현상에 유익한 에너지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내려온 인식이었다. 물론 그 에너지를 가리키는 용어는 수없이 다양하다. 그것들이 모두 기와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속성이 물리적 에너지가 아닌 초월적 에너지를 지칭하는 것이는 점만은 분명한 것 같다. 이와 같은 에너지를 다뤄온 이들은 주로 영매나 사제, 샤먼, 기공사, 예언자와 요가 등이었는데, 이들 역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인간은 보이는 몸(육체)과 보이지 않는 몸(기체, 혹은 영체)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 질병을 올바로 치유하려면 보이지 않는 몸의 이상까지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보이는 몸인 육체는 썩어 없어지지만, 보이지 않는 몽한 영체는 육체와 분리되어 다른 차원의 세계로 간다. 사람들이 흔히 '저 세상'이라 부르는 다른 차원의 세계는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낮은 층에서 맴도는 이른바, 부유령, 지방령으로 불려온 영체들은 지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떨쳐내지 못한 까닭에 기회만 있으면 사람 몸에 깃들어 종종 해를 끼치곤 한다. 이것이 이른바 빙의 현상이다. 흔히 기 치료라 하면 빙의에 걸린 이를 치료하는 것만 생각하기 쉬우나 실은 낮은 차원의 영체를 더욱 높은 차원으로 보내줄 때도 기, 즉 우주 에너지의 힘을 활용한다. 반대로 높은 차원의 영체가 이 세상의 누군가를 돕기 위해 잠시 나타나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 때 쓰이는 에너지 역시 기이다.
자연은 일정한 법칙이나 틀로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고 리듬있는 과정에 의해서만 다루어질 수 있다. 자연계에서 진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자세히 살려보면 오늘날 물리학이나 화학에서 만들어 믿고 있는 필수조건(법칙)들은 그 의미를 찾기 어렵다. 자연은 자신의 성장과 진화를 위한 기본원리로서 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의 기계장치와는 근본적으로 작동원리가 상이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문명의 이기들은 자연 자연적이지 못한 잘못된 기술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들이다. 오늘날 과학과는 대조적으로 빅터(Viktor Schauberger)는 물리적 존재의 주요 요인이 되는 힘을 '정신'과 '의지'라고 생각했다. 정신과 의지는 4차원이나 5차원- 즉 본래적으로 내재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익숙한 3차원의 세계에서는 감지할 수 없는 아주 미약하고 미공간적인 차원-에 속한 다양한 에너지-정신이나 의지보다는 등급과 중요도가 떨어지는-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표출한다. 정신과 의지는 에테르와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 아주 높은 파장대에 속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잠재능력은 지극히 예민하여 자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반응을 일으키며 에너지가 극히 불안정한 상태로 일정한 평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어떤 자극이나 기회가 주어지면 즉각 반응하여 자신의 모습과 영향력을 드러낸다. 이처럼 보다 높은 차원, 그래서 훨씬 강력하고 심오한 차원의 실체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므로 빅터 자신의 정신과 의지를 포함하는 6차원 이상의 수준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었음에 틀임없다. 이런 차원에서는 하나의 개념 혹은 현상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과 체득하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이루어진다. 아마도 이런 차원은 모든 것과 통할 수 있는 차원, 순수한 진리의 차원, 혹은 의심과 오해가 전혀 없는 전체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말하기를, "오늘날의 많은 생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들의 생명력을 지탱해주는 온갖 종류의 진동들- 어떤 형태를 갖출 수 있도록 정보와 에너지를 제공하는 모든 진동들-은 너무나 약한 수준으로 떨어져 있어서 더 이상 그들의 복잡한 생체구조를 유지할 만큼 충분한 에너지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 결과 오늘날 자연 주변에서는 수많은 생물들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했다.
오늘날 주위를 좀더 진지하게 관찰해보면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다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과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는 세계관이 너무나 획일적인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런데 획일적인 성향은 진동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에너지의 특성이 전혀 발현될 수 없다. 이것은 퇴보를 의미한다. 게다가 그 흐름이 너무나 거세고 맹렬하기 이를 데 없다. 높은 수준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우리 주위의 창조적 에너지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되어야 한다. 그러나 창조적 에너지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함으로써 우리 주위에서는 다양한 종들이 잇달아 멸종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우리의 곁에서 사라져가는 모든 종들은 우리가 지키고 보호해야 할 생명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기적으로 아직은 멸종되어서는 안될 생명체들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영성과 인식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 그래서 자연의 본성인 창조의지를 다시 불러일으키고 그로부터 자연의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에너지를 이끌어내 우리 주변에 새로운 원기를 북돋워 주어야 한다."고 했다.
수준 높은 영성이란 수준 높은 에너지라는 의미이다. 이런 에너지가 인간의 정신으로 유입되어 인간의 의식세계에서 새롭게 변화되면 인간의 의식계가 한층 더 풍성해진다. 이 과정에서 생각이라는 비물질계의 실체이자 창조의지가 거주하는 것이며 복잡하기 그지없는 창조 에너지의 영역인 자연도 덩달아 풍성하게 탈바꿈할 것이다.
육체상태에서 저차원의 영혼인 자아(ego)가 언제난 자기 편향적인 행동약식, 의식, 자기 본위적인 아집 등을 강하게 표출하며 행동하는 동안 영혼은 물질적인 속성으로 빠져들어서 타인보다는 자기만을 중시하는 이기적인 속성을 띤다. 이러한 성향으로 말미암아 이곳에서의 영혼은 주변으로부터 자신에게 결여되거나 부족한 특성을 독점적으로 획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이곳의 영혼에게는 재산 혹은 물질적, 육체적 감각만이 중요하게 부각될 뿐이다. 그러나 비록 이런 행동에 대해서 본인은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이들의 행동은 영적 근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곳의 영혼은 환상에 불과한 물질적인 행복을 추구하므로 자신만의 세계로 모든 것을 끌어들려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영혼이 지닌 정신적인 에너지와 추진력(마음)은 언제나 더 높은 차원의 자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므로 평생동안 축적해 온 물질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영혼은 언제나 불만과 허전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영혼이 느끼는 불만은 무의식상태에서 인식의 표면으로 돌출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지금까지 집착해온 모든 것들이 덧없고 부질없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른다. 이는 마치 태풍의 중심이 텅 비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영혼은 지금까지 물질만이 물리적인 실체로 인식했으나 이제는 물질에 대해 회의(懷疑)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참된 안정과 평화는 물질이 아닌 보다 높은 차원의 비물질계(진정한 실체)로부터 기인함을 깨닫는다.
영혼이 물질 수준으로 전락하면 생자기장은 육체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주위에만 머물 뿐 결코 최고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일단 중력에 의한 자극이 고갈되어 물질로서의 한계에 이르면 잠복중이던 생자기장이 활기를 띠게 되고 이와 더불어 탐욕적이든 영혼은 마침내 고차원적인 생자기장의 특성과 공명하기 시작한다. 이는 모든 것이 중심에서 응집되어 상승하는 태풍과도 유사한 현상으로서 영혼은 생자기력에 이끌려 상승하기 시작한다. 부양력이 점점 증가할수록 생자기장은 상승작용을 가속화하여 영혼을 근원지로 다시 유도한다. 영혼은 고차원의 에너지층과 다양한 영성의 차원을 통과, 상승하면서 탄생시와는 정반대로 진동상태 혹은 진동수가가 증가한다. 지금까지 영혼은 축을 중심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회전했으나 이제부터는 성질을 달리하여 중심에서 원주로 팽창하기 시작하며 주변의 우주와 이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마침내 영혼이 주변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 무한히 높은 진동상태에 도달하여 우주의 모든 것과 하나로 융화되면서 자신의 개체성을 상실하고 다시 원래 태어났던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육체와 결합되어 있던 지금까지의 인생은 길고도 힘들었으며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물질계의 여정(旅程)을 끝내면서 물질계의 공허함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물론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영혼의 평정을 회복한다. 영혼은 평화로부터 샘솟는 이타적인 사랑으로 충만하여 우주 전체(현상계는 물론 물론 비현상계를 포함하여 전 우주를 총칭)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항구히 전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영혼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나름대로의 우주의 평화에 기여한다.
결론을 내리자면 기는 우주의 모든 차원을 관통하며 모든 부분에서 기능을 발휘한다. 기를 우주 근원의 빛이며 생명 에너지라 함은 바로 이 때문이라 할 것이라고 신과학자들은 주장한다.
정신과 물질을 통합 시킬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생리학을 토대로 한 의식 설명에 대한 문제점은, 의식 자체에 대한 뚜렷한 개념이 형성되지 않는 상태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즉 의식 자체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것이다. 의식의 반성은 지각의 반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것은 모든 인식과 경험이 주체자의 의식(意識)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신체의 기능을 궁극적으로 추궁해 들어가게 되면 소위 경험에만 매달려서 세상을 보는 과학의 허점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자주 경험 과학의 핵심적 특징을 과학적 가설 또는 이론의 선택이 경험적 테스트에 의해 조절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험 결과를 관찰하면서 과학자들은 증거와 대립하는 이론들을 버리고 관찰에 의해 도입된 이론을 유지하리라 결심할 것이다. 관찰된 사실을 놓고 검토하는 것은 과학의 객관성에 핵심적인 요소인 것처럼 보인다.
과학 이론의 선택에는 관련된 많은 문제가 존재한다. 그 중의 하나는 관찰이라는 자체의 문제이다. 관찰에 대한 전통적 입장은 한 과학자가 '직접적으로' 어떤 실험 결과가 나타나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실험 결과의 발견은 그 과학자의 다른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특별히 실험 결과가 발견되느냐 않느냐는 과학자가 이미 받아들이고 있거나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 이론과는 상관없이 결정된다. 관찰과 이론적 선입견의 이러한 분야는 경쟁하는 이론들을 객관적으로 테스트하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실험 결과가 한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는 어떤 과학자에게 한 가지 모습으로 보이고 그 이론과 경쟁하는 이론을 받아들이는 과학자에게는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면 관찰은 이론 선택의 방법이나 세계의 본성에 관한 논쟁을 종식시키는 방법을 제공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문제는 일종의 순환성에 빠지고 만다. 결국 과학적 객관성은 관찰에 대한 이론 독립성, 또는 이론 중립성을 요청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론과 관찰에 관한 전통적인 논의에서는, 관찰이 객관적 요구 사항을 만족시켰다고 가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한 전제, 즉 관찰의 심리적 과정이 관찰하는 과학자의 이론적인 믿음에서 도출되지 않는다는 전제에 암묵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전반에 일부의 과학 철학자들은 이러한 가정에 도전하였다. 심리학의 신시각 운동(New Look Movement)에 부분적으로 바탕을 두고 핸슨과 토마스 쿤과 같은 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이론 중립성의 가정을 부정하였다. 대신에 그들은 관찰은 이론에 얹혀 있다고(laden with theory) 주장하였다. 과학자들의 관찰이라고 하는 바로 그것은 그들이 이미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고 있다. 이런 주장은 과학의 객관성에 심각하게 도전한 것이다.
핸슨은 요한네스 케플러와 티코 브라헤가 새벽 하늘을 관찰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고 한다. 케플러는 태양이 고정되어 있고 지구가 그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한 반면 브라헤는 지구가 고정되어 있고 태양이 그 주위를 돈다고 보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핸슨은 과연 케플러와 브라헤가 진정으로 같은 것을 보았지만 다른 것을 결론지었는지 묻는다. 그는 이 상황을 배경과 주제를 바꾸어 볼 수 있는 그림, 즉 예를 들어오리나 토끼로 볼 수 있는 그림이나 양과 새 모두와 닮은 그림을 보는 것에 비유한다. 그런 그림들을 보고 있으며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그림의 모습이 바뀔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핸슨은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의 '조건'(set)이나 기대의 결과라는 것을 주장하는 점에서 게슈탈트(Gestalt)나 신시각 심리학(New Look psychology)를 따르고 있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이전의 경험이나 훈련이 우리의 눈이 세계와 마주하게 되었을 때 시각 체계를 어떻게 준비시켰는지를 반영한다. 훈련된 물리학자와 에스키모 아기가 X선 관(管)을 보았을 때 그들은(적어도 본다는 말의 한 가지 의미에서) '같은 것을 보지는' 않을 것이다.
쿤은 이러한 주제들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그가 범형(paradigm)이라 불렸던 개념적 도식이나 이론적 구조는 지각 자체의 선결 조건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범형에 나타나는 변화는 과학자로 하여금 그가 몸담고 있는 연구의 대상이 되는 세계를 게슈탈트적 변화에서처럼 다르게 경험하도록 한다. 비숫한 문제가 넬슨 굿맨에 의해 개진되었다. '우리가 볼 준비가 된(우리가 기대하는 것 또는 우리의 기대에 강하게 부응하는) 것을 보는 것 그리고 우리의 목적에 방해하지도 돕지도 안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늘 벌어지는 일이며 심리학 연구실에서 수없이 확인되는 사실이다.'라고 했다.
지각의 이론 의존적 속성에 대한 이러한 주장들은 심리학 연구에 의해 계속적으로 확인되는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 연구자인 제리 포더는 그러한 결론은 반박한다. '배경 이론'(background theory) 같은 것이 지각 체계에 의해 이용돤다고 사실을 인정하지만 이러한 지각 체계들은 우리가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습득한 이론과 같은 것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포더는 지각 체계는 단원적(modular)이라고 가정한다. 이 단원적 체계들은 보다 큰 인지 체계의 여러 부분들 특별히 그가 '중앙 체계'(central system)라고 한 것에서 정보가 흘러 들어오지 않도록 장벽에 의해 고립되거나 독립되어 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널리 알려진 뭘러-라이어 착시 현상을 놓고 설명한다. 이 착시 현상은 길이가 같은 두 개의 선분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진 화살표를 가짐으로써 다른 길이를 갖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포더는 우리가 (측정을 통해서) 두 선분이 실제로 같은 길이를 가진 선분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한쪽 선분이 더 길게 보인다는 점을 지적한다. 선분의 길이가 같다는 정보는 중앙 체계에 그 기반을 두고 있지만 시각 체계를 관통하거나 시각 체계로 하여금 두 선분을 같은 길이로 볼 수 있게 하지는 못한다.
포더는 추론이 지각에 개입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지각에 개입되는 추론이 처리하는 정보의 범위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고 포더는 주장한다.
포더의 주장에 대한 자세한 반론이 이론적 정보에 의해 지각이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폴 처칠랜드에 의해 주어졌다. 처칠랜드는 지각은 자주 우리의 경험의 속성들을 수정하려는 일상적이거나 단순한 시도에 의해 영향받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물러-라이어 착시 현상은 실제로 배경 지식이 시각 정보 처리 과정을 쉽게 돤통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러나 처칠랜드는 시각 정보 처리 과정이 반대되는 정보에 의해 쉽게 또는 순식간에 관통되느냐의 여부에 문제에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문제는 지각이 훈현, 연습, 혹은 조건화의 장기적 과정을 통해 관통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쿤은 한 과학자의 지각을 형성하는 것은 범형을 적용하는 표준적인 방법, 장기적인 수련 과정을 통해 습득된 기술을 포함하는 전체적인 '학문 원형'(disciplinary matrix)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문제는 지각이 통시적으로 즉 오랜 경험이나 학습의 과정을 통해 관통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처칠랜드는이러한 통시적 관통 가능성을 지지하는 연구들을 추진한다.
따라서 순수한 감각을 도출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네의 신체는 갖고 있지 않다. 도리어 의미의 총체 형성에 기여하도록 수정 적용될 뿐이다. 예를 들면, 상자가 무겁다고 감각되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것이라고 판단하는데 있어 기여하기 위한 감각이다. 감각보다 판단이 우선이다. 왜냐하면 감각에 전제를 제공할 수 있는 어떠한 생리학적 감각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심리학자가 상급 법원에 호소하듯 생리학에 호소할 때 생리학은 심리학과 동일한 곤경에 빠진다. 이렇게 되면 여기서 시도되는 것은 기껏 존재론적 가치를 포기하고 방법론적 가치만을 선전한다. 신체는 사물이 아니다. 마치 자연이 기하학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자연은 우리 신체에 의해서 현상으로 이해되고 지각되는 것이지 결코 기계적 법칙으로 이해되고 지각되는 것이 아니다. 신체와 접촉된 경험은 즉시 응고된다. 그러면서도 신체는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다시 세상을 향해 對自的(대자적) 자세를 취하게 된다. 세상을 향해 자기 존재의 전망을 넓히는 것이다. 심리학자가 벌리는 실험의 허점은, 실험을 하면서 자기 자신의 접촉을 잃어버림으로써 타자의 행동에 맹목적이게 복속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기 신체의 고유의 기능을 포기하는 듯한 위장에 불과하다. 이것인 신체의 변형이 아니라 존재의 변형이다. 이 변형으로 인해 인간은 우연성에서 필연성을 함축해낸다. 객관적 사고는 지각의 주체를 무시한다. 이는 자연에 대한 인과적 관계, 즉 과학적 법칙마저 반성할 수 있는 신체의 고유한 성질을 무시하는 격이 된다. 바깥 경험을 인식하고 분석하기 위해 신체 고유의 존재성을 멈추는 것은, "내가 나의 눈으로 본다거나 나의 귀로 듣는다"는 말은 불합리하다. 그저 보여짐과 들려짐을 수집, 저장해 놓은 기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주체는 감각과 더불어 탄생해야 할 성질이다. 따라서 감각을 대상의 세계로 내쫓으면 아니 된다. 이런 모습은 주체의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 탈선이다. 인간의 지각이란 신체의 내적 가능성과 만나지 아니하면 성립되지 아니한다. 마치 남녀간의 정사 장면이 아동에게 가능하게 되는 성적 성숙 단계에 이르지 않는다면 그 장면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신체의 지각성은 사물 뿐만 아니라 타자(타인)에 관한 이해에도 적용된다. 타인과의 관계는 언어가 담당한다. 신체를 언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수한다. 나의 주체성을 위한 언어가 아니라 세계의 주체성과 분리될 수 없는 신체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통해서 신체 대 신체로서의 공존이 가능해진다. 물론 감각은 없고 의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주체가 되게 되면 아예 내적 인간이라는 또다른 의식을 내세워야 한다. 이것은 실제가 아니라 추상적인 통일성에 불과하다.
이렇게해서 과학은 현재의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해 궁극적인 것을 향하여 끊임없이 탐험하고 있다. 궁극성에 대한 탐구는 양적으로 원자론과 통하며 질적으로는 자아의 동일성, 혹은 정신의 절대성과 통한다. 즉 물질의 끝과 정신의 끝을 의미한다. 물론 양자의 의미는 동일한 차원에서 쉽게 이야기될 수 없다, 물질의 끝과 정신의 끝의 차이는 단순히 직관과 형식의 차이가 아니며, 또한 양과 질 사이만의 차이는 아닌 듯하다. 그리고 물질적인 것에서 물질의 끝이 있다는 생각과 정신적인 것에서 정신의 끝이 있을 것이라는 연속적인 사유 방식을 반성없이 받아들려야 할 것인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물질의 끝이 정신의 끝과 이어질 수 있다든가, 혹은 물질의 끝과 정신의 끝이 서로 만날 수 없지만 정신이 물질의 모델일 수 있다는 생각도 가능하다. 이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서 볼 때에 전자는 일원론적 심신론과 만나며, 후자는 이원론전 심신론과 만난다.
물질의 끝과 정신의 끝이 무엇인가? 그리고 과연 그 양쪽이 만날 수 있을까?
물질의 끝을 본격적으로 처음으로 다룬 이가 곧 철학의 시조이며 따라서 우리는 탈레스를 들 수 있다. 그러나 탈레스 이후의 자연철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물질과 정신이 혼재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한 혼재 속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정신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한다. 반면에 물질 쪽으로 시각을 정립시킨 이로는 우선 데모크리토스를 들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가 말한 원자는 물질적인 무엇이며, 양적으로 다수성을 갖지만 질적으로는 동일성을 갖는 그런 일원론적 궁극체이다.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물질의 궁극성을 찾으려는 데모크리토스의 사유 방식은 그 이후 돌턴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없이 계승되어 왔다.
그러나 20세기로 들어오면서 끝이라고 생각되어 왔던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분리되고,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로 분리되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제 양성자의 차원의 입장과 더 이상 분할될수 없는 마지막 물질의 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분할 불가능성에 걸맞게 소립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그 기본 입자라고 생각되어 온 소립자가 계속 발견되면서 그 수가 하나 둘씩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100개가 넘게 되었다. 대체로 분할의 끝인 기본 원자의 수는 많아야 다섯을 넘지 않는 범위여야 인간의 이성의 수요에 맞을 수 있다고 본다. 자연철학자들 중에서도 많아야 엠페도클레스처럼 그 수는 넷이었다. 동양에서도 분할의 기본수 개념은 다르지만 주역에서부터 시작되는 음양의 둘, 오행의 다섯, 혹은 사단의 넷과 같은 기본수의 개념이 있었다. 분할 의지가 강하게 나타나는 서양 철학에서는 더 더욱 하나와 둘 사이의 대립의 관계가 첨예하게 나타난다. 즉 가장 이상적인 수는 하나, 혹은 하나의 양면성으로 나타나는 두 개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 서구 이성주의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므로 20세기 이후 100개 이상이 된 소립자의 수로 인해 그것의 긍극적 성질을 의심받게 되었다, 100개 이상의 수는 경험 과학에서 그 단순성의 조건을 만족시키기에는 불완전한 것이다.
물리학의 폭발적인 발전과 더불어 미시 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과 우주의 거시 세계를 다루는 상대성 이론이 만나 양자 전지 역학(QED)과 양자 색역학(QCD)은 우리에게 아주 새로운 물질관을 보여주었다. 이제 물질의 마지막 끝은 양성자 차원의 소립자가 아니라 그것을 다시 구성하는 쿼크와 전자 차원의 렙론이라고 알려졌다.
쿼크(quark)는 양성자나 중성자를 구성하는 더 작은 소립자임이 밝혀졌다. 쿼크의 수는 이론상 세 종류의 가족(family)으로 구성된다. 0.01 Gev 에너지 수준의 업 쿼크(up quark)와 다운 쿼크(down quark), 0.15 Gev 에너지 수준의 스트레인지 쿼크(strange quark)와 참 쿼크(charm quark), 그리고 5.5 Gev의 보텀 쿼크(bottom quark)와 89Gev의 톱 쿼크(top quark)가 그것이다. 이 중의 세 쌍(family)의 여섯 가지 쿼크가 존재한다는 것은 현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핵 차원이 아닌 전자의 차원에서도 전자와 전자 중성미자와 뮤입자와 뮤 중성미자, 그리고 타우 입자와 타우 중성미자의 세 쌍으로 된 여섯 가지가 존재한다.
문제는 쿼크의 존재 방식이다.
고전적 물질관과 달리 쿼크의 존재 방식은 물리학과 그것에 관여된 철학을 뒤바꾸어 놓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면 쿼크의 존재로 인해서 요청되는 사유의 변화 내용은 무엇인가?
양성자와 같은 중입자(hardron)는 3개의 쿼크로 구성된다. 1968년 양성자가 기본입자가 아니라 더 작은 하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실험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 하부의 구성 물질을 따로 떼어 보여주지 못했다. 충돌 실험을 통해양성자를 붕괴시키면 그것은 하부 구성물인 쿼크가 아니라 새로운 양성자일 뿐이다. 즉 양성자가 쿼크로 구성되었다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이지, 그 쿼크들을 독립적으로 떼어낼 수는 없다. 물질에 작용하는 중력, 전자기력, 약력, 그리고 강력의 네 가지 힘 중에서 강력은 아마도 쿼크들을 영원히 구속하는 힘인 것처럼 알려져 있다. 현대 게이지(gauge theory)에 의하며 강력은 글루온(gluon)이라는 게이지 입자에 의해 전달되는 힘이다.
거시적 예를 들면,
물질 q1과 물질 q2 사이를 물질 g가 아주 빠른 속도로 돌고 있다면, q1과 q2는 누에고치처럼 누에가 뽑아 놓은 실에 비유되는 g에 의해 묶이게 된다. 이 이론에 의하면 힘이란 물질의 갈래치기를 통한 교환 작용일 뿐이다. 좀 더 상세히 설명하면, 물리학자 디랙의 반입자 개념은 일종의 수학적 가상 개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힘의 전달자로서의 교환 입자가 갖는 중요한 성질을 설명하는 계기가 된다. 우주 차원에서의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기본적으로 우주의 총에너지가 제로로 보존된다는 사실을 힘의 한다. 최초의 광자가 있어서 음전하의 준위에 있는 전자들 들뜨게 하여 현상계로 그 음전자를 띄운다. 그 띄워진 음전자가 바로 전자(electron)이다. 동시에 음전하 준위에 있던 자리는 비게되면 공동화 현상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공동화 주위가 모두 음전하이므로 그 공동에는 실제로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마치 양전하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양전자, 즉 반물질의 최초 개념이다.
여기서 광자는 교환 입자의 역학을 하는데, 이 교환입자는 쉼없이 갈래 치기 운동을 함으로써 물질을 만들어내고 붕괴시키는 작업을 한다. 여기서 갈래 치기 개념은 자신을 가지 치기하고 다시 가지 친 것들을 모으고 혹은 가지 친 것이 또 가지 치기를 하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정지되었거나 단선 운동 같으나 실제로는 단절없는 무수한 복잡 운동을 말한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에테르라는 가상 물질을 상정하지 않더라도 힘을 전달시킬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힘의 전달자 역할을 하는 교환입자인 게이지 보존( gauge boson )은 갈래 치기를 계속하여 임시 물질을 만들어 나가면서 행성사이의 중력에서부터 양성자와 전자 사이의 전자기력 그리고 쿼크들 사이의 강력을 설명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이것이 전기 역학과 양자 색역학의 기본 사유이다.
쿼크가 들어있는 중입자(hardron) 주머니에서 쿼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잡아당기면 주머니나 끈(string)이 된다. 끈을 끊으려는 에너지는 새로운 쿼크쌍을 만들게 된다. 자유 쿼크는 찾지 못하고 대신 두 개의 주머니, 즉 두 개의 중입자가 되는 식이다.
이것이 함의하는 세계상은 결국 세계의 연결성이다. 마치 모든 물질이 스프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를 건드라면 다른 모든 것이 움직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스프링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물질의 장(field)이며, 생성 소멸의 운동을 스스로 담지하고 있다.
양자 색역학에서 말하는 장(field) 개념은 에테르 개념과 물론 다르다. 에테르 개념은 에터르가 전달 속은 전파되어 가는 시간(duration)이 요청된다. 즉 스프링 구조를 인정한다 해도 그 스프링의 분리된 두 지점 a에서 c까지 격자망을 따라, 그리고 a와 c 사이의 b 지점을 통과해서 흘러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양자 색역학의 장 개념에서는 a에서 b를 통과하여 c까지 정보 전달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즉 동시적인 정보 전달 체계가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동시성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은 기존의 인과율적인 사유 방식으로는 대단히 어렵다.
양자 색역학의 기본 물질관은 물질 개념과 힘 개념을 서로 분리시키지 않는다는데 있다.
따라서 물질과 힘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볼 수 있다. 물질과 물질 사이에서 서로 에너지를 교환하면서 그것들을 서로 묶어주는 게이지 입자도 결국의 그 물질의 차원에서 설명된다. 고전적인 물질 개념은 연속적인 운동을 불연속적인 정지의 단속체로 바꾸어놓았다. 정지개념을 통해서만이 세계를 원자론적으로 설명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물질관은 그렇지 않다.
70년대 초에 이르러 초기 게이지 이론을 대칭성의 이론으로 단순화시켜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나왔다. 이와 연관되어 쿼크를 가상적으로 색깔을 입혀 그 쿼크들의 차별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차별성은 필연적, 내재적이 아니라 글루온 교환 입자에 의해 색깔이 바뀔 수 있는 그러한 우연적 차별일 뿐이다.
예를 들어 거시적 차원에서는 당연히 차별되는 두 사물도 좌우 대칭일 경우에 그것들을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적색 쿼크는 글루온 교환 입자에 의해 청색 쿼크 바뀌고, 청색 쿼크는 적색쿼크로 바뀐다. 따라서 글루온 교환 입자, 혹은 그 교환 입자들의 교화 활동을 거울이라고 생각하면 간편하다. 쿼크가 있으면 항상 그 거울이 붙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논리적으로는 독립적 쿼크를 상정할 수 있다.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을 분리시킬 수 없는 것에 비교될 수 있다. N극과 S극을 분리시키려고 막대자석을 자르면 여전히 잘려진 막대자석마다에 N극과 S극이 있다. 이러한 비유 방식으로 하나의 양정자를 붕괴시키면 쿼크로 분할되지 않고 여전히 또 다른 양성자로 되는 이유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쿼크들의 조합을 분해시켜도 그것은 또 다른 쿼크들의 조합을 만들어낼 뿐이다. 자유쿼크는 불가능하다.
쿼크의 존재는 분명히 물질의 궁극성을 의미하지만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결코 기존의 원자론적 틀에서 생각될 수 없는 새로운 궁극체이다. 궁극적 물질이기는 하지만 환원적이거나 원자적인 성격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쿼크를 설명하는 이론이 바로 초끈 이론이다(superstring theory)이다. 고전 역학에서는 입자는 점 입자(point matter)이며 독립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 점 입자가 운동하기 위해서는 외부적 힘이 필요했다.
그러나 초끈 이론에서는 힘과 물질은 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입자 게이지와 힘 게이지를 통일한 하나의 게이지로서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과학은 끝을 맺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20세기 과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이 아니라, 우리가 우주의 본질에 대해서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현대과학은 사물의 현상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기술하고 있지만, 본질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설명을 하지 못한다. 중력하면 곧바로 뉴턴의 사과를 떠올리면서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힘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과학자들이 현재 인식하고 있는 4개의 힘(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 중에서 가장 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중력이다. "중력이 왜 발생하는가?"하고 물어봤을 때, 두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기 때문이라고 답한다면 그것은 중력의 본질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두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은 중력으로 인한 결과일 뿐이지 중력이 발생하는 원인과 메카니즘은 아니다. 중력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왜 중력이 발생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일어나는 현상을 인정할 뿐이지 그 현상의 진정한 원인을 알지는 못한다. 중력과 관계가 있는 질량도 마찬가지다. 질량이 그냥 물체에 내재해 있는 한 속성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질량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본질은 모른 채 그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보고 이해하고 또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아주 가까운 자기 신체에 관한 사항, 즉 사람이 왜 잠을 자는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화려한 전자문명을 가능케 한 전자기력에 대해서도 그 본질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전자와 자기가 유도되는 현상이라든지 조심스럽게 다루는 법은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정작 자기의 본질이 무엇이고 전기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다. 마이너스 전하를 띠고 있는 전자와 플러스 전하를 띠고 있는 양성자에게 전기가 유래한다고? 그렇다면 전하는 무엇인가? 왜 입자들은 그러한 전하로 하전(荷電)되어 있는가?
과학이 지닌 이런 맹점과 한계는 그 철학적 바탕이 되는 패러다임의 문제이기도 하다. 과학은 이 패더다임을 스스로 뛰어넘으려고 한다. 현대물리학은 이미 신비한 대상들을 다루고 있다. 즉 빛보다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는 천체(퀘이사)와 몇십 광년이 벽도 아무렇지 않고 뚫고 지나가는 유령 같은 입자(중성 미자), 근처에 다가오는 물질은 모조리 집어삼켜 버리느 보이지도 않는 검은 괴물(블랙홀), 다른 공간으로 불쑥 튀어나갈 수 있는 공간 속에 뜷린 벌레구명(웜홀), 우리 현실과 동시에 존재하는 수많은 또 다른 현실들(평행우주), 우주에 딸린 우주(아기우주), 작은 공간 속에 말려 들어간 10차원 우주(초끈 이론),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거나(양자 터널링), 때로는 입자로 때로는 파동으로 모습을 바꾸는 입장의 변신술(입자와 파동의 이중성) 등등, 황당무계한 신비의 영역에 현대물리학은 성큼 들어서 버린 것이다.
'물리학의 도'를 쓴 카프라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이 책을 쓰게 된 동시는 5년 전에 겪은 아름다운 체험 때문이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의 어느날 오후, 나는 해변에 앉아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내 호흡의 리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나 자신을 둘러 싸고 있는 일체의 것이 장엄한 우주적 춤을 추고 있다고 느꼈다. 근처에 있는 모래나 바위, 바다와 공기가 진동하는 분자와 원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분자나 원자가 다른 입자들을 생성·소멸시키는 부단한 상호 작용을 거듭하고 있는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물리학자인 나는 익히 알고 있었다. 또 지구의 대기는 마치 소나기 같은 우주선의 폭격을 끊임없이 받고 있으며, 고에너지 입자인 우주선이 대기층을 통과할 때 무수한 충돌을 반복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고에너지 물리학 연구에 종사한 나로서는 매우 익숙한 현상이었지만 그 순간까지는 그래프나 도식, 또는 수학 이론을 통한 체험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해변에 앉아 있을 때 나의 이전 경험들이 싱싱한 생기를 띠면서 되살아났다. 나는 그때 수많은 입자들이 생성과 소멸의 율동적인 맥박을 되풀이하면서 우주로부터 쏟아져내려오는 에너지의 폭포를 보았던 것이다. 나는 또 다양한 원소들의 원자와 내몸의 원자들이 함께 에너지의 우주적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리듬을 느꼈고 그 소리를 들었으며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 현상이 바로 인두교도가 숭배하는 춤추는 신 '시비의 춤'인 것을 깨달았다." 신과학을 주창하는 자들은 이런 경험은 단순한 감정이나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때까지자연을 분석해 온 서구식 논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고로만 파악될 수 있는 자연의 새로운 분야라고 간주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차원에서, 파장과 정신과의 관계
물에도 과연 마음이 있는지를 생각해 본 사람이 있다.
일본의 에모토 마시루(江本勝)는 물의 결정이 외부 환경에 따라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일그러져 나타난다고 했다. 그는 적은 양의 물을 접시에 떨어뜨려 영하 20도 이하 냉동실에 넣고 3시간 정도 얼린 후 고성능 현미경으로 찍었다. 그 결과는 어떤 음악이나 어떤 말에 따라 물의 결정이 다르게 나타났다고 한다. 예를 들면, 베토벤 전원 교향곡을 들려준 결정은 밝고 아름답게 정돈된 모양이지만 분노와 반항의 언어로 가득찬 헤비메탈 곡은 제 멋대로 깨진 형태로 나타났다. 또 '감사'나 '사랑' 같은 말을 들려주면 물의 결정이 아름다워지는데 반해 욕설을 들려주면 결정이 흩어지고 찌그러졌다. 그는 뿐만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채취한 물 결정을 보여 줬는데 대도시의 물에는 아예 결정이 형성되지 않았는데 이는 지나친 오염과 염소량 때문에 물이 그만큼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반면에 벤쿠버나 코펜하겐, 취리히의 물은 결정이 아름다웠다. 그의 주장은 인간의 생각과 의식이 인간의 몸에만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물질 세계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데 초점이 있다.
전체를 가지고 부분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신과학으로 나아가는 힌트가 된다.
그런데 이 정보를 가지고 신과학을 주창하는 자들이 있다.
기에는 원적외선, 초저주파, 생물광자 같은 것으로 측정되는, 즉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물리적 수준의 기가 있는가하면,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초광속의 싸이Psi 에너지로서의 기가 있다. 싸이 에너지는 사람의 마음 상태, 즉 의식과 이미지에 좌우된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흔히 초현상이라 부르는 텔레파시, 염력, 초감각적 인식(ESP) 등과 관련 있는 에너지를 싸이 에너지라 한다. 물리적 수준의 에너지는 인체의 체액(진피 결합 조직과 각 기관의 결합조직의 물이 많은 층) 속을 일정한 방향과 속도를 지니고 흐고 있다. 이러한 에너지의 흐름을 제어하여 방향과 속도를 조정, 어떤 특정한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 경락계이다. 이런 에너지는 일종의 물리화학적인 에너지라 할 수 있는데 체액 속 경락을 따라 어떤 기능을 수행하며 흐는 것이 특징이다. 흔히 기공사가 에너지를 보낸다고 할 때 그 범위는 10m 이내이며, 체내에 들어간 그 에너지는 1초에 20cm 가량의 속도로 이동한다는 것이 중국에서 실험한 결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싸이 에너지는 초광속으로 전달되며 타키온과 마찬가지로 빛의 속도의 10억 배도 넘는 무한대의 속도로 전달된다고, 세계 기연구자들은 추정한다.
현대 중국에 어떤 초능력는 몇 가지 신기한 기능력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물질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그들은 부서진 물품을 원래 모습으로 복원시키며 뚜껑이 닫힌 병속의 약을, 병을 깨지 않은 상태에서 깜쪽같이 밖으로 꺼내기도 하고, 갈기갈기 찢긴 나뭇잎을 원래대로 복원시키는 능력을 보여준다. 또 몸 안에 있는 종양을 들어내 병을 고치기도 한다. 두 번째는 염동(PK)능력으로, 이는 수천 리 밖에 두고온 서류 봉투를 순간적으로 이동시키거나 자동차를 다른 지점까지 공간 이동시키는 능력을 말한다. 또 하나는 소생 능력으로, 죽은 병아리를 원래 상태로 살려내는 것, 군밤을 다시 생밤으로 되돌리는 것, 삶아서 붉게 익힌 새우를 투명한 생새우로 다시 살려내는 것, 볶은 땅콩을 생땅콩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볶은 땅콩으로 되돌리는 것 등이 이에 속한다.
기와 관련하여 또 한가지 중요하게 알아야 할 것은 기와 의식의 관계이다. 기라는 파동을 받아드릴 때 파장을 맞추는 것이나, 혹은 상대방에게 기하는 파동을 보낼 때 파장을 맞추는 것 모두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진언이나 만트라를 회우면 뇌세포의 기능 단위인 칼럼군이 차례로 흥분하게 되는데, 이처럼 흥분할 때 나타나는 컬럼군의 패턴에 따라 어떤 성질의 기를 낼 것인가 하는 것이 결정된다. 목적에 맞는 진언과 만트라가 각각 정해져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기의 파장을 맞추는 것이 의식임을 분명히 알게 되지만 의식불명의 환자를 원격치유로 깨어나게 하거나 잠자는 환자에게 일방적으로 기를 보내 치유하는 실례도 있음을 고려하면, 뇌의 활동 전체가 의식에 대응하는 것은 아니며, 의식과 관계없는 뇌의 활동도 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우주 공간에 생명 현상에 유익한 에너지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내려온 인식이었다. 물론 그 에너지를 가리키는 용어는 수없이 다양하다. 그것들이 모두 기와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속성이 물리적 에너지가 아닌 초월적 에너지를 지칭하는 것이는 점만은 분명한 것 같다. 이와 같은 에너지를 다뤄온 이들은 주로 영매나 사제, 샤먼, 기공사, 예언자와 요가 등이었는데, 이들 역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인간은 보이는 몸(육체)과 보이지 않는 몸(기체, 혹은 영체)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 질병을 올바로 치유하려면 보이지 않는 몸의 이상까지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보이는 몸인 육체는 썩어 없어지지만, 보이지 않는 몽한 영체는 육체와 분리되어 다른 차원의 세계로 간다. 사람들이 흔히 '저 세상'이라 부르는 다른 차원의 세계는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낮은 층에서 맴도는 이른바, 부유령, 지방령으로 불려온 영체들은 지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떨쳐내지 못한 까닭에 기회만 있으면 사람 몸에 깃들어 종종 해를 끼치곤 한다. 이것이 이른바 빙의 현상이다. 흔히 기 치료라 하면 빙의에 걸린 이를 치료하는 것만 생각하기 쉬우나 실은 낮은 차원의 영체를 더욱 높은 차원으로 보내줄 때도 기, 즉 우주 에너지의 힘을 활용한다. 반대로 높은 차원의 영체가 이 세상의 누군가를 돕기 위해 잠시 나타나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 때 쓰이는 에너지 역시 기이다.
자연은 일정한 법칙이나 틀로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고 리듬있는 과정에 의해서만 다루어질 수 있다. 자연계에서 진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자세히 살려보면 오늘날 물리학이나 화학에서 만들어 믿고 있는 필수조건(법칙)들은 그 의미를 찾기 어렵다. 자연은 자신의 성장과 진화를 위한 기본원리로서 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의 기계장치와는 근본적으로 작동원리가 상이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문명의 이기들은 자연 자연적이지 못한 잘못된 기술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들이다. 오늘날 과학과는 대조적으로 빅터(Viktor Schauberger)는 물리적 존재의 주요 요인이 되는 힘을 '정신'과 '의지'라고 생각했다. 정신과 의지는 4차원이나 5차원- 즉 본래적으로 내재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익숙한 3차원의 세계에서는 감지할 수 없는 아주 미약하고 미공간적인 차원-에 속한 다양한 에너지-정신이나 의지보다는 등급과 중요도가 떨어지는-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표출한다. 정신과 의지는 에테르와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 아주 높은 파장대에 속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잠재능력은 지극히 예민하여 자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반응을 일으키며 에너지가 극히 불안정한 상태로 일정한 평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어떤 자극이나 기회가 주어지면 즉각 반응하여 자신의 모습과 영향력을 드러낸다. 이처럼 보다 높은 차원, 그래서 훨씬 강력하고 심오한 차원의 실체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므로 빅터 자신의 정신과 의지를 포함하는 6차원 이상의 수준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었음에 틀임없다. 이런 차원에서는 하나의 개념 혹은 현상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과 체득하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이루어진다. 아마도 이런 차원은 모든 것과 통할 수 있는 차원, 순수한 진리의 차원, 혹은 의심과 오해가 전혀 없는 전체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말하기를, "오늘날의 많은 생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들의 생명력을 지탱해주는 온갖 종류의 진동들- 어떤 형태를 갖출 수 있도록 정보와 에너지를 제공하는 모든 진동들-은 너무나 약한 수준으로 떨어져 있어서 더 이상 그들의 복잡한 생체구조를 유지할 만큼 충분한 에너지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 결과 오늘날 자연 주변에서는 수많은 생물들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했다.
오늘날 주위를 좀더 진지하게 관찰해보면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다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과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는 세계관이 너무나 획일적인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런데 획일적인 성향은 진동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에너지의 특성이 전혀 발현될 수 없다. 이것은 퇴보를 의미한다. 게다가 그 흐름이 너무나 거세고 맹렬하기 이를 데 없다. 높은 수준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우리 주위의 창조적 에너지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되어야 한다. 그러나 창조적 에너지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함으로써 우리 주위에서는 다양한 종들이 잇달아 멸종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우리의 곁에서 사라져가는 모든 종들은 우리가 지키고 보호해야 할 생명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기적으로 아직은 멸종되어서는 안될 생명체들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영성과 인식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 그래서 자연의 본성인 창조의지를 다시 불러일으키고 그로부터 자연의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에너지를 이끌어내 우리 주변에 새로운 원기를 북돋워 주어야 한다."고 했다.
수준 높은 영성이란 수준 높은 에너지라는 의미이다. 이런 에너지가 인간의 정신으로 유입되어 인간의 의식세계에서 새롭게 변화되면 인간의 의식계가 한층 더 풍성해진다. 이 과정에서 생각이라는 비물질계의 실체이자 창조의지가 거주하는 것이며 복잡하기 그지없는 창조 에너지의 영역인 자연도 덩달아 풍성하게 탈바꿈할 것이다.
육체상태에서 저차원의 영혼인 자아(ego)가 언제난 자기 편향적인 행동약식, 의식, 자기 본위적인 아집 등을 강하게 표출하며 행동하는 동안 영혼은 물질적인 속성으로 빠져들어서 타인보다는 자기만을 중시하는 이기적인 속성을 띤다. 이러한 성향으로 말미암아 이곳에서의 영혼은 주변으로부터 자신에게 결여되거나 부족한 특성을 독점적으로 획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이곳의 영혼에게는 재산 혹은 물질적, 육체적 감각만이 중요하게 부각될 뿐이다. 그러나 비록 이런 행동에 대해서 본인은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이들의 행동은 영적 근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곳의 영혼은 환상에 불과한 물질적인 행복을 추구하므로 자신만의 세계로 모든 것을 끌어들려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영혼이 지닌 정신적인 에너지와 추진력(마음)은 언제나 더 높은 차원의 자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므로 평생동안 축적해 온 물질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영혼은 언제나 불만과 허전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영혼이 느끼는 불만은 무의식상태에서 인식의 표면으로 돌출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지금까지 집착해온 모든 것들이 덧없고 부질없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른다. 이는 마치 태풍의 중심이 텅 비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영혼은 지금까지 물질만이 물리적인 실체로 인식했으나 이제는 물질에 대해 회의(懷疑)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참된 안정과 평화는 물질이 아닌 보다 높은 차원의 비물질계(진정한 실체)로부터 기인함을 깨닫는다.
영혼이 물질 수준으로 전락하면 생자기장은 육체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주위에만 머물 뿐 결코 최고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일단 중력에 의한 자극이 고갈되어 물질로서의 한계에 이르면 잠복중이던 생자기장이 활기를 띠게 되고 이와 더불어 탐욕적이든 영혼은 마침내 고차원적인 생자기장의 특성과 공명하기 시작한다. 이는 모든 것이 중심에서 응집되어 상승하는 태풍과도 유사한 현상으로서 영혼은 생자기력에 이끌려 상승하기 시작한다. 부양력이 점점 증가할수록 생자기장은 상승작용을 가속화하여 영혼을 근원지로 다시 유도한다. 영혼은 고차원의 에너지층과 다양한 영성의 차원을 통과, 상승하면서 탄생시와는 정반대로 진동상태 혹은 진동수가가 증가한다. 지금까지 영혼은 축을 중심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회전했으나 이제부터는 성질을 달리하여 중심에서 원주로 팽창하기 시작하며 주변의 우주와 이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마침내 영혼이 주변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 무한히 높은 진동상태에 도달하여 우주의 모든 것과 하나로 융화되면서 자신의 개체성을 상실하고 다시 원래 태어났던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육체와 결합되어 있던 지금까지의 인생은 길고도 힘들었으며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물질계의 여정(旅程)을 끝내면서 물질계의 공허함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물론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영혼의 평정을 회복한다. 영혼은 평화로부터 샘솟는 이타적인 사랑으로 충만하여 우주 전체(현상계는 물론 물론 비현상계를 포함하여 전 우주를 총칭)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항구히 전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영혼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나름대로의 우주의 평화에 기여한다.
결론을 내리자면 기는 우주의 모든 차원을 관통하며 모든 부분에서 기능을 발휘한다. 기를 우주 근원의 빛이며 생명 에너지라 함은 바로 이 때문이라 할 것이라고 신과학자들은 주장한다.
정신과 물질을 통합 시킬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생리학을 토대로 한 의식 설명에 대한 문제점은, 의식 자체에 대한 뚜렷한 개념이 형성되지 않는 상태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즉 의식 자체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것이다. 의식의 반성은 지각의 반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것은 모든 인식과 경험이 주체자의 의식(意識)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신체의 기능을 궁극적으로 추궁해 들어가게 되면 소위 경험에만 매달려서 세상을 보는 과학의 허점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자주 경험 과학의 핵심적 특징을 과학적 가설 또는 이론의 선택이 경험적 테스트에 의해 조절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험 결과를 관찰하면서 과학자들은 증거와 대립하는 이론들을 버리고 관찰에 의해 도입된 이론을 유지하리라 결심할 것이다. 관찰된 사실을 놓고 검토하는 것은 과학의 객관성에 핵심적인 요소인 것처럼 보인다.
과학 이론의 선택에는 관련된 많은 문제가 존재한다. 그 중의 하나는 관찰이라는 자체의 문제이다. 관찰에 대한 전통적 입장은 한 과학자가 '직접적으로' 어떤 실험 결과가 나타나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실험 결과의 발견은 그 과학자의 다른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특별히 실험 결과가 발견되느냐 않느냐는 과학자가 이미 받아들이고 있거나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 이론과는 상관없이 결정된다. 관찰과 이론적 선입견의 이러한 분야는 경쟁하는 이론들을 객관적으로 테스트하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실험 결과가 한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는 어떤 과학자에게 한 가지 모습으로 보이고 그 이론과 경쟁하는 이론을 받아들이는 과학자에게는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면 관찰은 이론 선택의 방법이나 세계의 본성에 관한 논쟁을 종식시키는 방법을 제공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문제는 일종의 순환성에 빠지고 만다. 결국 과학적 객관성은 관찰에 대한 이론 독립성, 또는 이론 중립성을 요청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론과 관찰에 관한 전통적인 논의에서는, 관찰이 객관적 요구 사항을 만족시켰다고 가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한 전제, 즉 관찰의 심리적 과정이 관찰하는 과학자의 이론적인 믿음에서 도출되지 않는다는 전제에 암묵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전반에 일부의 과학 철학자들은 이러한 가정에 도전하였다. 심리학의 신시각 운동(New Look Movement)에 부분적으로 바탕을 두고 핸슨과 토마스 쿤과 같은 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이론 중립성의 가정을 부정하였다. 대신에 그들은 관찰은 이론에 얹혀 있다고(laden with theory) 주장하였다. 과학자들의 관찰이라고 하는 바로 그것은 그들이 이미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고 있다. 이런 주장은 과학의 객관성에 심각하게 도전한 것이다.
핸슨은 요한네스 케플러와 티코 브라헤가 새벽 하늘을 관찰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고 한다. 케플러는 태양이 고정되어 있고 지구가 그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한 반면 브라헤는 지구가 고정되어 있고 태양이 그 주위를 돈다고 보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핸슨은 과연 케플러와 브라헤가 진정으로 같은 것을 보았지만 다른 것을 결론지었는지 묻는다. 그는 이 상황을 배경과 주제를 바꾸어 볼 수 있는 그림, 즉 예를 들어오리나 토끼로 볼 수 있는 그림이나 양과 새 모두와 닮은 그림을 보는 것에 비유한다. 그런 그림들을 보고 있으며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그림의 모습이 바뀔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핸슨은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의 '조건'(set)이나 기대의 결과라는 것을 주장하는 점에서 게슈탈트(Gestalt)나 신시각 심리학(New Look psychology)를 따르고 있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이전의 경험이나 훈련이 우리의 눈이 세계와 마주하게 되었을 때 시각 체계를 어떻게 준비시켰는지를 반영한다. 훈련된 물리학자와 에스키모 아기가 X선 관(管)을 보았을 때 그들은(적어도 본다는 말의 한 가지 의미에서) '같은 것을 보지는' 않을 것이다.
쿤은 이러한 주제들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그가 범형(paradigm)이라 불렸던 개념적 도식이나 이론적 구조는 지각 자체의 선결 조건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범형에 나타나는 변화는 과학자로 하여금 그가 몸담고 있는 연구의 대상이 되는 세계를 게슈탈트적 변화에서처럼 다르게 경험하도록 한다. 비숫한 문제가 넬슨 굿맨에 의해 개진되었다. '우리가 볼 준비가 된(우리가 기대하는 것 또는 우리의 기대에 강하게 부응하는) 것을 보는 것 그리고 우리의 목적에 방해하지도 돕지도 안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늘 벌어지는 일이며 심리학 연구실에서 수없이 확인되는 사실이다.'라고 했다.
지각의 이론 의존적 속성에 대한 이러한 주장들은 심리학 연구에 의해 계속적으로 확인되는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 연구자인 제리 포더는 그러한 결론은 반박한다. '배경 이론'(background theory) 같은 것이 지각 체계에 의해 이용돤다고 사실을 인정하지만 이러한 지각 체계들은 우리가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습득한 이론과 같은 것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포더는 지각 체계는 단원적(modular)이라고 가정한다. 이 단원적 체계들은 보다 큰 인지 체계의 여러 부분들 특별히 그가 '중앙 체계'(central system)라고 한 것에서 정보가 흘러 들어오지 않도록 장벽에 의해 고립되거나 독립되어 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널리 알려진 뭘러-라이어 착시 현상을 놓고 설명한다. 이 착시 현상은 길이가 같은 두 개의 선분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진 화살표를 가짐으로써 다른 길이를 갖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포더는 우리가 (측정을 통해서) 두 선분이 실제로 같은 길이를 가진 선분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한쪽 선분이 더 길게 보인다는 점을 지적한다. 선분의 길이가 같다는 정보는 중앙 체계에 그 기반을 두고 있지만 시각 체계를 관통하거나 시각 체계로 하여금 두 선분을 같은 길이로 볼 수 있게 하지는 못한다.
포더는 추론이 지각에 개입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지각에 개입되는 추론이 처리하는 정보의 범위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고 포더는 주장한다.
포더의 주장에 대한 자세한 반론이 이론적 정보에 의해 지각이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폴 처칠랜드에 의해 주어졌다. 처칠랜드는 지각은 자주 우리의 경험의 속성들을 수정하려는 일상적이거나 단순한 시도에 의해 영향받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물러-라이어 착시 현상은 실제로 배경 지식이 시각 정보 처리 과정을 쉽게 돤통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러나 처칠랜드는 시각 정보 처리 과정이 반대되는 정보에 의해 쉽게 또는 순식간에 관통되느냐의 여부에 문제에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문제는 지각이 훈현, 연습, 혹은 조건화의 장기적 과정을 통해 관통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쿤은 한 과학자의 지각을 형성하는 것은 범형을 적용하는 표준적인 방법, 장기적인 수련 과정을 통해 습득된 기술을 포함하는 전체적인 '학문 원형'(disciplinary matrix)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문제는 지각이 통시적으로 즉 오랜 경험이나 학습의 과정을 통해 관통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처칠랜드는이러한 통시적 관통 가능성을 지지하는 연구들을 추진한다.
따라서 순수한 감각을 도출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네의 신체는 갖고 있지 않다. 도리어 의미의 총체 형성에 기여하도록 수정 적용될 뿐이다. 예를 들면, 상자가 무겁다고 감각되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것이라고 판단하는데 있어 기여하기 위한 감각이다. 감각보다 판단이 우선이다. 왜냐하면 감각에 전제를 제공할 수 있는 어떠한 생리학적 감각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심리학자가 상급 법원에 호소하듯 생리학에 호소할 때 생리학은 심리학과 동일한 곤경에 빠진다. 이렇게 되면 여기서 시도되는 것은 기껏 존재론적 가치를 포기하고 방법론적 가치만을 선전한다. 신체는 사물이 아니다. 마치 자연이 기하학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자연은 우리 신체에 의해서 현상으로 이해되고 지각되는 것이지 결코 기계적 법칙으로 이해되고 지각되는 것이 아니다. 신체와 접촉된 경험은 즉시 응고된다. 그러면서도 신체는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다시 세상을 향해 對自的(대자적) 자세를 취하게 된다. 세상을 향해 자기 존재의 전망을 넓히는 것이다. 심리학자가 벌리는 실험의 허점은, 실험을 하면서 자기 자신의 접촉을 잃어버림으로써 타자의 행동에 맹목적이게 복속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기 신체의 고유의 기능을 포기하는 듯한 위장에 불과하다. 이것인 신체의 변형이 아니라 존재의 변형이다. 이 변형으로 인해 인간은 우연성에서 필연성을 함축해낸다. 객관적 사고는 지각의 주체를 무시한다. 이는 자연에 대한 인과적 관계, 즉 과학적 법칙마저 반성할 수 있는 신체의 고유한 성질을 무시하는 격이 된다. 바깥 경험을 인식하고 분석하기 위해 신체 고유의 존재성을 멈추는 것은, "내가 나의 눈으로 본다거나 나의 귀로 듣는다"는 말은 불합리하다. 그저 보여짐과 들려짐을 수집, 저장해 놓은 기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주체는 감각과 더불어 탄생해야 할 성질이다. 따라서 감각을 대상의 세계로 내쫓으면 아니 된다. 이런 모습은 주체의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 탈선이다. 인간의 지각이란 신체의 내적 가능성과 만나지 아니하면 성립되지 아니한다. 마치 남녀간의 정사 장면이 아동에게 가능하게 되는 성적 성숙 단계에 이르지 않는다면 그 장면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신체의 지각성은 사물 뿐만 아니라 타자(타인)에 관한 이해에도 적용된다. 타인과의 관계는 언어가 담당한다. 신체를 언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수한다. 나의 주체성을 위한 언어가 아니라 세계의 주체성과 분리될 수 없는 신체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통해서 신체 대 신체로서의 공존이 가능해진다. 물론 감각은 없고 의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주체가 되게 되면 아예 내적 인간이라는 또다른 의식을 내세워야 한다. 이것은 실제가 아니라 추상적인 통일성에 불과하다.
이렇게해서 과학은 현재의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해 궁극적인 것을 향하여 끊임없이 탐험하고 있다. 궁극성에 대한 탐구는 양적으로 원자론과 통하며 질적으로는 자아의 동일성, 혹은 정신의 절대성과 통한다. 즉 물질의 끝과 정신의 끝을 의미한다. 물론 양자의 의미는 동일한 차원에서 쉽게 이야기될 수 없다, 물질의 끝과 정신의 끝의 차이는 단순히 직관과 형식의 차이가 아니며, 또한 양과 질 사이만의 차이는 아닌 듯하다. 그리고 물질적인 것에서 물질의 끝이 있다는 생각과 정신적인 것에서 정신의 끝이 있을 것이라는 연속적인 사유 방식을 반성없이 받아들려야 할 것인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물질의 끝이 정신의 끝과 이어질 수 있다든가, 혹은 물질의 끝과 정신의 끝이 서로 만날 수 없지만 정신이 물질의 모델일 수 있다는 생각도 가능하다. 이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서 볼 때에 전자는 일원론적 심신론과 만나며, 후자는 이원론전 심신론과 만난다.
물질의 끝과 정신의 끝이 무엇인가? 그리고 과연 그 양쪽이 만날 수 있을까?
물질의 끝을 본격적으로 처음으로 다룬 이가 곧 철학의 시조이며 따라서 우리는 탈레스를 들 수 있다. 그러나 탈레스 이후의 자연철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물질과 정신이 혼재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한 혼재 속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정신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한다. 반면에 물질 쪽으로 시각을 정립시킨 이로는 우선 데모크리토스를 들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가 말한 원자는 물질적인 무엇이며, 양적으로 다수성을 갖지만 질적으로는 동일성을 갖는 그런 일원론적 궁극체이다.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물질의 궁극성을 찾으려는 데모크리토스의 사유 방식은 그 이후 돌턴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없이 계승되어 왔다.
그러나 20세기로 들어오면서 끝이라고 생각되어 왔던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분리되고,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로 분리되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제 양성자의 차원의 입장과 더 이상 분할될수 없는 마지막 물질의 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분할 불가능성에 걸맞게 소립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그 기본 입자라고 생각되어 온 소립자가 계속 발견되면서 그 수가 하나 둘씩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100개가 넘게 되었다. 대체로 분할의 끝인 기본 원자의 수는 많아야 다섯을 넘지 않는 범위여야 인간의 이성의 수요에 맞을 수 있다고 본다. 자연철학자들 중에서도 많아야 엠페도클레스처럼 그 수는 넷이었다. 동양에서도 분할의 기본수 개념은 다르지만 주역에서부터 시작되는 음양의 둘, 오행의 다섯, 혹은 사단의 넷과 같은 기본수의 개념이 있었다. 분할 의지가 강하게 나타나는 서양 철학에서는 더 더욱 하나와 둘 사이의 대립의 관계가 첨예하게 나타난다. 즉 가장 이상적인 수는 하나, 혹은 하나의 양면성으로 나타나는 두 개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 서구 이성주의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므로 20세기 이후 100개 이상이 된 소립자의 수로 인해 그것의 긍극적 성질을 의심받게 되었다, 100개 이상의 수는 경험 과학에서 그 단순성의 조건을 만족시키기에는 불완전한 것이다.
물리학의 폭발적인 발전과 더불어 미시 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과 우주의 거시 세계를 다루는 상대성 이론이 만나 양자 전지 역학(QED)과 양자 색역학(QCD)은 우리에게 아주 새로운 물질관을 보여주었다. 이제 물질의 마지막 끝은 양성자 차원의 소립자가 아니라 그것을 다시 구성하는 쿼크와 전자 차원의 렙론이라고 알려졌다.
쿼크(quark)는 양성자나 중성자를 구성하는 더 작은 소립자임이 밝혀졌다. 쿼크의 수는 이론상 세 종류의 가족(family)으로 구성된다. 0.01 Gev 에너지 수준의 업 쿼크(up quark)와 다운 쿼크(down quark), 0.15 Gev 에너지 수준의 스트레인지 쿼크(strange quark)와 참 쿼크(charm quark), 그리고 5.5 Gev의 보텀 쿼크(bottom quark)와 89Gev의 톱 쿼크(top quark)가 그것이다. 이 중의 세 쌍(family)의 여섯 가지 쿼크가 존재한다는 것은 현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핵 차원이 아닌 전자의 차원에서도 전자와 전자 중성미자와 뮤입자와 뮤 중성미자, 그리고 타우 입자와 타우 중성미자의 세 쌍으로 된 여섯 가지가 존재한다.
문제는 쿼크의 존재 방식이다.
고전적 물질관과 달리 쿼크의 존재 방식은 물리학과 그것에 관여된 철학을 뒤바꾸어 놓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면 쿼크의 존재로 인해서 요청되는 사유의 변화 내용은 무엇인가?
양성자와 같은 중입자(hardron)는 3개의 쿼크로 구성된다. 1968년 양성자가 기본입자가 아니라 더 작은 하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실험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 하부의 구성 물질을 따로 떼어 보여주지 못했다. 충돌 실험을 통해양성자를 붕괴시키면 그것은 하부 구성물인 쿼크가 아니라 새로운 양성자일 뿐이다. 즉 양성자가 쿼크로 구성되었다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이지, 그 쿼크들을 독립적으로 떼어낼 수는 없다. 물질에 작용하는 중력, 전자기력, 약력, 그리고 강력의 네 가지 힘 중에서 강력은 아마도 쿼크들을 영원히 구속하는 힘인 것처럼 알려져 있다. 현대 게이지(gauge theory)에 의하며 강력은 글루온(gluon)이라는 게이지 입자에 의해 전달되는 힘이다.
거시적 예를 들면,
물질 q1과 물질 q2 사이를 물질 g가 아주 빠른 속도로 돌고 있다면, q1과 q2는 누에고치처럼 누에가 뽑아 놓은 실에 비유되는 g에 의해 묶이게 된다. 이 이론에 의하면 힘이란 물질의 갈래치기를 통한 교환 작용일 뿐이다. 좀 더 상세히 설명하면, 물리학자 디랙의 반입자 개념은 일종의 수학적 가상 개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힘의 전달자로서의 교환 입자가 갖는 중요한 성질을 설명하는 계기가 된다. 우주 차원에서의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기본적으로 우주의 총에너지가 제로로 보존된다는 사실을 힘의 한다. 최초의 광자가 있어서 음전하의 준위에 있는 전자들 들뜨게 하여 현상계로 그 음전자를 띄운다. 그 띄워진 음전자가 바로 전자(electron)이다. 동시에 음전하 준위에 있던 자리는 비게되면 공동화 현상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공동화 주위가 모두 음전하이므로 그 공동에는 실제로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마치 양전하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양전자, 즉 반물질의 최초 개념이다.
여기서 광자는 교환 입자의 역학을 하는데, 이 교환입자는 쉼없이 갈래 치기 운동을 함으로써 물질을 만들어내고 붕괴시키는 작업을 한다. 여기서 갈래 치기 개념은 자신을 가지 치기하고 다시 가지 친 것들을 모으고 혹은 가지 친 것이 또 가지 치기를 하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정지되었거나 단선 운동 같으나 실제로는 단절없는 무수한 복잡 운동을 말한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에테르라는 가상 물질을 상정하지 않더라도 힘을 전달시킬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힘의 전달자 역할을 하는 교환입자인 게이지 보존( gauge boson )은 갈래 치기를 계속하여 임시 물질을 만들어 나가면서 행성사이의 중력에서부터 양성자와 전자 사이의 전자기력 그리고 쿼크들 사이의 강력을 설명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이것이 전기 역학과 양자 색역학의 기본 사유이다.
쿼크가 들어있는 중입자(hardron) 주머니에서 쿼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잡아당기면 주머니나 끈(string)이 된다. 끈을 끊으려는 에너지는 새로운 쿼크쌍을 만들게 된다. 자유 쿼크는 찾지 못하고 대신 두 개의 주머니, 즉 두 개의 중입자가 되는 식이다.
이것이 함의하는 세계상은 결국 세계의 연결성이다. 마치 모든 물질이 스프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를 건드라면 다른 모든 것이 움직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스프링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물질의 장(field)이며, 생성 소멸의 운동을 스스로 담지하고 있다.
양자 색역학에서 말하는 장(field) 개념은 에테르 개념과 물론 다르다. 에테르 개념은 에터르가 전달 속은 전파되어 가는 시간(duration)이 요청된다. 즉 스프링 구조를 인정한다 해도 그 스프링의 분리된 두 지점 a에서 c까지 격자망을 따라, 그리고 a와 c 사이의 b 지점을 통과해서 흘러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양자 색역학의 장 개념에서는 a에서 b를 통과하여 c까지 정보 전달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즉 동시적인 정보 전달 체계가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동시성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은 기존의 인과율적인 사유 방식으로는 대단히 어렵다.
양자 색역학의 기본 물질관은 물질 개념과 힘 개념을 서로 분리시키지 않는다는데 있다.
따라서 물질과 힘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볼 수 있다. 물질과 물질 사이에서 서로 에너지를 교환하면서 그것들을 서로 묶어주는 게이지 입자도 결국의 그 물질의 차원에서 설명된다. 고전적인 물질 개념은 연속적인 운동을 불연속적인 정지의 단속체로 바꾸어놓았다. 정지개념을 통해서만이 세계를 원자론적으로 설명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물질관은 그렇지 않다.
70년대 초에 이르러 초기 게이지 이론을 대칭성의 이론으로 단순화시켜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나왔다. 이와 연관되어 쿼크를 가상적으로 색깔을 입혀 그 쿼크들의 차별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차별성은 필연적, 내재적이 아니라 글루온 교환 입자에 의해 색깔이 바뀔 수 있는 그러한 우연적 차별일 뿐이다.
예를 들어 거시적 차원에서는 당연히 차별되는 두 사물도 좌우 대칭일 경우에 그것들을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적색 쿼크는 글루온 교환 입자에 의해 청색 쿼크 바뀌고, 청색 쿼크는 적색쿼크로 바뀐다. 따라서 글루온 교환 입자, 혹은 그 교환 입자들의 교화 활동을 거울이라고 생각하면 간편하다. 쿼크가 있으면 항상 그 거울이 붙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논리적으로는 독립적 쿼크를 상정할 수 있다.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을 분리시킬 수 없는 것에 비교될 수 있다. N극과 S극을 분리시키려고 막대자석을 자르면 여전히 잘려진 막대자석마다에 N극과 S극이 있다. 이러한 비유 방식으로 하나의 양정자를 붕괴시키면 쿼크로 분할되지 않고 여전히 또 다른 양성자로 되는 이유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쿼크들의 조합을 분해시켜도 그것은 또 다른 쿼크들의 조합을 만들어낼 뿐이다. 자유쿼크는 불가능하다.
쿼크의 존재는 분명히 물질의 궁극성을 의미하지만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결코 기존의 원자론적 틀에서 생각될 수 없는 새로운 궁극체이다. 궁극적 물질이기는 하지만 환원적이거나 원자적인 성격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쿼크를 설명하는 이론이 바로 초끈 이론이다(superstring theory)이다. 고전 역학에서는 입자는 점 입자(point matter)이며 독립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 점 입자가 운동하기 위해서는 외부적 힘이 필요했다.
그러나 초끈 이론에서는 힘과 물질은 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입자 게이지와 힘 게이지를 통일한 하나의 게이지로서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과학은 끝을 맺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20세기 과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이 아니라, 우리가 우주의 본질에 대해서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현대과학은 사물의 현상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기술하고 있지만, 본질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설명을 하지 못한다. 중력하면 곧바로 뉴턴의 사과를 떠올리면서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힘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과학자들이 현재 인식하고 있는 4개의 힘(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 중에서 가장 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중력이다. "중력이 왜 발생하는가?"하고 물어봤을 때, 두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기 때문이라고 답한다면 그것은 중력의 본질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두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은 중력으로 인한 결과일 뿐이지 중력이 발생하는 원인과 메카니즘은 아니다. 중력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왜 중력이 발생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일어나는 현상을 인정할 뿐이지 그 현상의 진정한 원인을 알지는 못한다. 중력과 관계가 있는 질량도 마찬가지다. 질량이 그냥 물체에 내재해 있는 한 속성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질량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본질은 모른 채 그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보고 이해하고 또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아주 가까운 자기 신체에 관한 사항, 즉 사람이 왜 잠을 자는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화려한 전자문명을 가능케 한 전자기력에 대해서도 그 본질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전자와 자기가 유도되는 현상이라든지 조심스럽게 다루는 법은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정작 자기의 본질이 무엇이고 전기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다. 마이너스 전하를 띠고 있는 전자와 플러스 전하를 띠고 있는 양성자에게 전기가 유래한다고? 그렇다면 전하는 무엇인가? 왜 입자들은 그러한 전하로 하전(荷電)되어 있는가?
과학이 지닌 이런 맹점과 한계는 그 철학적 바탕이 되는 패러다임의 문제이기도 하다. 과학은 이 패더다임을 스스로 뛰어넘으려고 한다. 현대물리학은 이미 신비한 대상들을 다루고 있다. 즉 빛보다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는 천체(퀘이사)와 몇십 광년이 벽도 아무렇지 않고 뚫고 지나가는 유령 같은 입자(중성 미자), 근처에 다가오는 물질은 모조리 집어삼켜 버리느 보이지도 않는 검은 괴물(블랙홀), 다른 공간으로 불쑥 튀어나갈 수 있는 공간 속에 뜷린 벌레구명(웜홀), 우리 현실과 동시에 존재하는 수많은 또 다른 현실들(평행우주), 우주에 딸린 우주(아기우주), 작은 공간 속에 말려 들어간 10차원 우주(초끈 이론),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거나(양자 터널링), 때로는 입자로 때로는 파동으로 모습을 바꾸는 입장의 변신술(입자와 파동의 이중성) 등등, 황당무계한 신비의 영역에 현대물리학은 성큼 들어서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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