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스페인 출신인 달리는 그림에 대한 재능을 일찍 발견하고 격려해준 중산층 부모를 두었던
행운아였다. 스페인어로 "구원자"라는 뜻의 살바도르라 이름지어진 것은 회화도 데생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는 이 시대에 회화를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라는 소명이었다. 그는 마드리드 왕립미술학교에서 수학할 당시 선생들의 자질을 문제삼다가 퇴학을 당한 후 파리로
가서 초현실주의 화가, 시인들과 교유하였다. 이듬해 최초의 개인전을 열면서 정식으로 초현실주의 그룹에 합류하였고, 초현실주의 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같은 해 그는 폴 엘뤼아르의 부인 갈라를 평생의 동반자, 모델, "초현실주의 뮤즈"로 삼으면서 그녀에게서 영원한
영감을 받게된다.
* 초현실주의- 다다 운동의 뒤를 이은 무의식의 세계를 정복하고
심화시키고자 하는
운동. 프로이드의
발견 내용을 탐구하고 행하던 예술 세계
스스로 "편집광적 비판적 방법"이라 부른 달리의 창작기법은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환각을 객관적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1955년 소르본 대학에서의 강연을 통해 그는 자신의 방법론을 설파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1937년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로 복귀하려는 욕구가 커졌으며, 초현실주의 화가 그룹에서
제명당하면서까지도 원자과학이나 가톨릭의 신비성을 추구하며 왕성한 작품활동을 벌였다.
젊은 시절의 달리는 아주 소심하고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었다. 이를 보상하기 위해 그는 '천재의 역할을 해보기'로 결심하고
어른이 되어 외향적 성격으로 발전시켰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달리의 개성, 달리의 '유니폼', 달리적인 혐오가 실제로는 그가 가면을
쓰고 행동했던 것이다.
40m 짜리 빵으로 세상을 뒤덮을 상상을 했던 달리는 기행과 충격에서 즐거움을 얻는 자신에
집착하는 자기현시자가 되었다. 그는 기묘하게 위로 향한 콧수염을 과시했고, 카메라를 향해 싫은 표정을 지어보이고, 유명 사진작가를 위해
초현실주의적 세팅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 또한 이상한 옷을 입기도 했다. 1936년 런던 전시회의 개막식을 위한 그의 의상은 마치
무의식의 세계로 내려가기 위하기라도 하듯 심해 다이버의 복장이었다.
그는 당돌하게 37살에 자신의 외설스러운 성적 환상과 자위행위에
대한 열정을 자세히 적은 자서전도 출판했다.
달리는 돈을 벌 욕심으로 부유한 후원자들에게 아첨은 물론 광고와
디스플레이, 뉴욕 월드 페어의 오락관 디자인,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망각의 여로>에 드림 시퀀스를 위한 스케치를 제공하면서 몇년을
미국에 머물렀다. 그는 미국의 여배우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여배우의 머리가 초현실주의적 아파트로 그려지고, 붉은 입술은 소파가
되었다. 입술 소파는 후에 가구로도 만들어졌다.
<위대한 수음자>- 물렁물렁한 형태, 우글거리는 유기물, 신랄한 에로티시즘 등은 세상의
온갖
고뇌를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다.
달리가 편두통에 시달렸던 어느날 저녁 끈끈하게 녹아내리는 카망베르 치즈를
먹은 후 그린 작품으로 물렁물렁한 시계로 삶의 무기력한 시간을 보여주고 있다.
<끝없는 수수께끼> 달리가 즐겨 사용하는 여러겹으로 겹친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특징적인 그림으로, 누워있는 사람, 사냥개, 사람얼굴, 정물화, 신화 등에 나오는 동물 등
6개의 주제가 겹치고 있다.
<전쟁의 얼굴>
<삶은 완두콩과 흐믈흐믈한 구성>- 부제 : 내란의
전조 스페인
내전을 주제로 한 작품.
끈적끈적하고 부풀어 오른 살덩이들은 달리의 초기 작품들에서 거의 일관성있게 나타나는
주제이다. 이 시기에 그는 과거 거장들의 기법에 숙달해 있었고, 유년기에 인상주의로부터 영향받은 작품들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달리는 자신의 그림을 이렇게 정의한다. "내 작품은
구체적 불합리성에 대한 최상의 기상천외한, 한번도 보여진 적이 없는 이미지를 담은 천연색
즉석사진이다"
달리는 스캔들과 자극적 언사로 악명을 떨쳤다. 그는 꿈에 영향받은 녹아내리는
시계와 같이 불합리한 이미지 표현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이런 이미지들을 정확하고도 환상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달리의 능란한 스타일과
기묘하고 키치같은 이미지들의 차용으로 별로 세련되지 않은 기호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의 작품은 포스터와 엽서로 널리
복제되었다. 초현실주의라는 그의 브랜드는 많은 광고제작자들에게 영향을 주고있다.
달리는 모순, 역설, 심술궂은
의견으로 대중들을 혼동시키고 이들의 호기심을 자아내려고 했다. 예를 들어 달리가 파시즘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을
때,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면서도 자신은 "군주제 지지자이며 무정부주의자이다!" 라고 선언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특출한
개인으로 주장하기 위해 달리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보이려고 했다. 이는 그가 사교 모임과 모든 종류의 집단주의를 배격했고, 상업과
대중매체를 좋아하고, 사실과 허구를 흐려놓으려는 태도를 설명해 준다.
달리의 말년은 예술적 정신의 쇠퇴와 질병으로
얼룩졌으며, 이 시기 동안 그가 백지에다 사인을 함으로써 달리 시장이 모조품으로 오염되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1974년
달리는 자신의 미술관을 고향 피게레스에 세웠다. 훗날 여기에 그의 유해가 안장되었다. 달리 사후에 '갈라 달리 캐슬 뮤지엄
하우스'와 '살바도르 달리 뮤지엄 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2000년 한해에 이 세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의 수는 90만명이
넘었다. 오늘날 달리를 기리는 수많은 웹사이트가 있고 그의 판화와 기념품을 판매하고 꼭 필요한 진위 감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가상 갤러리가
있다. 70대 노인이 되었을 때 "죄가 될 정도로 부자"라는 표현을 즐겨쓰던 살바도르 달리는 피카소와 함께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화가이다. 편지 겉봉이나 그림엽서에 그의 가느다란 콧수염을 그려넣고 "스페인"이라고만 쓰면 그가 살고있는 곳으로
어김없이 배달됐다 할 정도이다.
달리가 친구 루이스 부뉴엘과 합작한 전위영화
<안달루시아의 개>의 한 장면 입이 없는 가면, 빕 대신 외음부의 음모가 자리잡고 있는 가면, 잘려진 손, 면도칼로
도려내어 지는 마치 여자 아이의 눈처럼 보이는 송아지의 눈, 양팔 밑에 성게를 끼고 있는 소녀의
누드 등 충격적 장면으로 이루어진 17분 분량의 영화. 이것은 파리의 미술, 사교계에 비수를 꽂았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초기 회화와 영화의 일부가 현대 미술에 상당한 공헌을 한 건 사실이다. 그가 친구 루이스
부뉴엘과 합작한 전위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9)와 <황금시대>(1931)는 영화사에 독자적인 의의를 남겼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경력은 윤리적 순수성과 미학적 질 대신 돈과 명성을 지나치게 추구했다는 비판도 있다. 달리를 '부끄러운'
삶을 살았던 억압된 동성애자로 나타낸 '명성'과 '치욕'을 연결시킨 TV다큐멘터리가 제작되기도 했다.
스스로를
상품화시킨 아트 스타 살바도르 달리. 스스로를 천재라 공언한 그는 84세에 파킨슨 병으로 숨을 거두기까지 셀 수 없는 논문과 10여권이
넘는 책을 집필했으며 순수 회화와 응용미술, 대중문화 전반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성과를 이뤄냈다.
달리 사후 10여년 넘게
그의 순회전이 세계 각지에서 열렸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몇 해전 달리전이 열렸으나 스스로 피카소를 능가한다고 말하는 이 거장의 질
좋은 작품을 구해오기란 쉽지 않아서인지 전시 내용 면에서 그리 좋은 평을 듣지는 못했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