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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및

무의식을 가장 잘 시각화 한 20세기 아트스타 '살바도르 달리'

by 현상아 2006. 9. 6.

 
 피카소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스페인 출신인 달리는 그림에 대한 재능을 일찍 발견하고 격려해준 중산층 부모를 두었던 행운아였다.
스페인어로 "구원자"라는 뜻의 살바도르라 이름지어진 것은 회화도 데생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는 이 시대에 회화를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라는 소명이었다.
그는 마드리드 왕립미술학교에서 수학할 당시 선생들의 자질을 문제삼다가 퇴학을 당한 후
파리로 가서 초현실주의 화가, 시인들과 교유하였다.
이듬해 최초의 개인전을 열면서 정식으로 초현실주의 그룹에 합류하였고, 초현실주의 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같은 해 그는 폴 엘뤼아르의 부인 갈라를 평생의 동반자, 모델, "초현실주의 뮤즈"로 삼으면서
그녀에게서 영원한 영감을 받게된다. 

* 초현실주의- 다다 운동의 뒤를 이은 무의식의 세계를 정복하고 심화시키고자 하는 운동.
                    프로이드의 발견 내용을 탐구하고 행하던 예술 세계

  스스로 "편집광적 비판적 방법"이라 부른 달리의 창작기법은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환각을 객관적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1955년 소르본 대학에서의 강연을 통해 그는 자신의 방법론을 설파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1937년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로 복귀하려는 욕구가 커졌으며, 초현실주의 화가 그룹에서 제명당하면서까지도 원자과학이나 가톨릭의 신비성을 추구하며 왕성한 작품활동을 벌였다. 

 젊은 시절의 달리는 아주 소심하고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었다.
이를 보상하기 위해 그는 '천재의 역할을 해보기'로 결심하고 어른이 되어 외향적 성격으로 발전시켰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달리의 개성, 달리의 '유니폼', 달리적인 혐오가 실제로는 그가 가면을 쓰고 행동했던 것이다.

 40m 짜리 빵으로 세상을 뒤덮을 상상을 했던 달리는 기행과 충격에서 즐거움을 얻는 자신에 집착하는 자기현시자가 되었다.
그는 기묘하게 위로 향한 콧수염을 과시했고, 카메라를 향해 싫은 표정을 지어보이고, 유명 사진작가를 위해 초현실주의적 세팅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 또한 이상한 옷을 입기도 했다.
1936년 런던 전시회의 개막식을 위한 그의 의상은 마치 무의식의 세계로 내려가기 위하기라도 하듯 심해 다이버의 복장이었다.

그는 당돌하게 37살에 자신의 외설스러운 성적 환상과 자위행위에 대한 열정을 자세히 적은
자서전도 출판했다.

 달리는 돈을 벌 욕심으로 부유한 후원자들에게 아첨은 물론 광고와 디스플레이, 뉴욕 월드 페어의 오락관 디자인,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망각의 여로>에 드림 시퀀스를 위한 스케치를 제공하면서 몇년을 미국에 머물렀다.
그는 미국의 여배우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여배우의 머리가 초현실주의적 아파트로 그려지고, 붉은 입술은 소파가 되었다.
입술 소파는 후에 가구로도 만들어졌다.




<위대한 수음자>- 물렁물렁한 형태, 우글거리는 유기물, 신랄한 에로티시즘 등은 세상의 온갖
                          고뇌를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다.


 달리가 편두통에 시달렸던 어느날 저녁 끈끈하게 녹아내리는 카망베르 치즈를 먹은 후 그린
 작품으로 물렁물렁한 시계로 삶의 무기력한 시간을 보여주고 있다.



<끝없는 수수께끼>
  달리가 즐겨 사용하는 여러겹으로 겹친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특징적인 그림으로, 누워있는
  사람, 사냥개, 사람얼굴, 정물화, 신화 등에 나오는 동물 등 6개의 주제가 겹치고 있다.






<전쟁의 얼굴>


<삶은 완두콩과 흐믈흐믈한 구성>- 부제 : 내란의 전조
                                                스페인 내전을 주제로 한 작품.

 끈적끈적하고 부풀어 오른 살덩이들은 달리의 초기 작품들에서 거의 일관성있게 나타나는
주제이다.
이 시기에 그는 과거 거장들의 기법에 숙달해 있었고, 유년기에 인상주의로부터 영향받은 작품들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달리는 자신의 그림을 이렇게 정의한다.
 "내 작품은 구체적 불합리성에 대한 최상의 기상천외한, 한번도 보여진 적이 없는 이미지를
  담은 천연색 즉석사진이다"

  달리는 스캔들과 자극적 언사로 악명을 떨쳤다.
그는 꿈에 영향받은 녹아내리는 시계와 같이 불합리한 이미지 표현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이런 이미지들을 정확하고도 환상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달리의 능란한 스타일과 기묘하고 키치같은 이미지들의 차용으로 별로 세련되지 않은 기호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의 작품은 포스터와 엽서로 널리 복제되었다.
초현실주의라는 그의 브랜드는 많은 광고제작자들에게 영향을 주고있다.

 달리는 모순, 역설, 심술궂은 의견으로 대중들을 혼동시키고 이들의 호기심을 자아내려고 했다.
예를 들어  달리가 파시즘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을 때,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면서도
자신은 "군주제 지지자이며 무정부주의자이다!" 라고 선언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특출한 개인으로 주장하기 위해 달리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보이려고 했다.
이는 그가 사교 모임과 모든 종류의 집단주의를 배격했고, 상업과 대중매체를 좋아하고, 사실과 허구를 흐려놓으려는 태도를 설명해 준다.

 달리의 말년은 예술적 정신의 쇠퇴와 질병으로 얼룩졌으며, 이 시기 동안 그가 백지에다 사인을 함으로써 달리 시장이 모조품으로 오염되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1974년 달리는 자신의 미술관을 고향 피게레스에 세웠다.
훗날 여기에 그의 유해가 안장되었다.
달리 사후에 '갈라 달리 캐슬 뮤지엄 하우스'와  '살바도르 달리 뮤지엄 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2000년 한해에 이 세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의 수는 90만명이 넘었다.
오늘날 달리를 기리는 수많은 웹사이트가 있고 그의 판화와 기념품을 판매하고 꼭 필요한 진위 감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가상 갤러리가 있다.
 
 70대 노인이 되었을 때 "죄가 될 정도로 부자"라는 표현을 즐겨쓰던 살바도르 달리는 피카소와 함께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화가이다.
편지 겉봉이나 그림엽서에 그의 가느다란 콧수염을 그려넣고 "스페인"이라고만 쓰면 그가 살고있는 곳으로 어김없이 배달됐다 할 정도이다.

  달리가 친구 루이스 부뉴엘과 합작한 전위영화
                                                          <안달루시아의 개>의 한 장면
  입이 없는 가면, 빕 대신 외음부의 음모가 자리잡고 있는 가면, 잘려진 손, 면도칼로 도려내어 
  지는 마치 여자 아이의 눈처럼 보이는 송아지의 눈, 양팔 밑에 성게를 끼고 있는 소녀의 누드
  등 충격적 장면으로 이루어진 17분 분량의 영화.
  이것은 파리의 미술, 사교계에 비수를 꽂았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초기 회화와 영화의 일부가 현대 미술에 상당한 공헌을 한 건 사실이다.
그가 친구 루이스 부뉴엘과 합작한 전위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9)와 <황금시대>(1931)는 영화사에 독자적인 의의를 남겼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경력은 윤리적 순수성과 미학적 질 대신 돈과 명성을 지나치게 추구했다는 비판도 있다.
달리를 '부끄러운' 삶을 살았던 억압된 동성애자로 나타낸 '명성'과 '치욕'을 연결시킨 TV다큐멘터리가 제작되기도 했다.

  스스로를 상품화시킨 아트 스타 살바도르 달리.
스스로를 천재라 공언한 그는 84세에 파킨슨 병으로 숨을 거두기까지 셀 수 없는 논문과 10여권이 넘는 책을 집필했으며 순수 회화와 응용미술, 대중문화 전반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성과를 이뤄냈다.

 달리 사후 10여년 넘게 그의 순회전이 세계 각지에서 열렸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몇 해전 달리전이 열렸으나 스스로 피카소를 능가한다고 말하는 이 거장의 질 좋은 작품을 구해오기란 쉽지 않아서인지 전시 내용 면에서 그리 좋은 평을 듣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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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패러디 작품들
2006/09/05 오후 4:29 | 현대미술


<모나리자>에 자신의 얼굴을 삽입한 자화상




밀레의 <만종>을 재해석



<천지 창조>를 재해석



밀로의 <비너스>를 재해석


                          <달리가 매기는 화가들의 성적표>
                   
                         기법   영감   색조   데생   천재성   구성   독창성   신비감   진실성    평균  
레오나르도다빈치  17      18      15       19       20       18        19         20         20       18.4
메소니에                5       0        1        3        0         1         2         17         18         5.2
엥그르                 15      12       11      15        0         6         6         10         20        10.5
벨라스케스           20      19       20      19       20       20        20         15         20        19.2
달리                    12      17       10      17       19       18        17         19         19        16.4
베르메르              20      20       20      20       20       20        19         20         20        19.9
피카소                  9       19        9      18       20       16         7           2          7         11.9
라파엘로              19      19       18      20       20       20        20         20         20         19.5
마네                     3        1        6        4        0         4          5          0         14          4.1
몬드리안               0        0        0        0        0         1        1.5         0        3.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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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리안 0.6... 캐안습.. 껄껄껄
06/09/06 (수) 오후 7:23   [324] from 60.197.21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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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의 팜므파탈 '갈라'
2006/09/05 오후 2:39 | 현대미술

 
  '갈라'와 '달리'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25살 때,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하나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 '갈라'와의 운명적 만남을 맞이한다.
당시 그녀는 35살이었으니 달리보다 10살이나 연상이었다.
그러나, 달리는 갈라에게서 직감적으로 어린 나이에 여읜 어머니의 이미지와 자신의 비정상적인 성적 취향을 충족시켜 줄 수 있을 육체적 매력을 느꼈다.
갈라 역시 특이한 청년 달리의 매력에 이끌렸다.

 엘뤼아르는 달리와의 애정 행각으로 또 한번 아내의 배신을 겪으면서도 자신에게 돌아와 달라고 간절히 애원했다.
그러나, 갈라는 남편과 딸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이 전에 갈라는 몇 년에 걸쳐 화가 에른스트와도 사랑에 빠졌었다.
엘뤼아르는 에른스트에 대한 동성애와 아내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그들의 관계를 묵묵히 지켜 볼 뿐이었다.
파리 근교 자신의 집에서 에른스트와 갈라가 함께 밤을 보낼 때면 엘뤼아르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과  재즈음악으로 고통을 달래기가 일쑤였다.
그럼에도 엘뤼아르는 그저 아내가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결국 엘뤼아르의 잠적 소동으로 이 관계는 끝나고 두 사람은 원상태로 돌아왔지만, 갈라에게 더 이상 엘뤼아르에 대한 애정은 없었다.

 갈라는 가정으로 돌아왔으나 하루하루가 지루할 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남편과 딸로부터 도망쳐 유럽 각지를 사치하며 돌아다녔다.
어처구니 없지만 이 모든 여행 경비는 엘뤼아르가 기꺼이 충당했다.
부친의 죽음으로 엘뤼아르가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자 그녀의 씀씀이는 더욱 헤퍼졌다.
결국 경제 공황과 투자 실패로 엘뤼아르는 파산하고 갈라는 어쩔 수 없이 파리로 되돌아 와야만
했다.
그러던 차에 달리와의 만남은 그녀를 더 이상 엘뤼아르의 곁에 머물 이유가 없게끔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갈라가 새로운 사랑의 도박에 자신의 전부를 걸게 된 이유는 달리의 빛나는 재능을 일찍 간파하였기 때문이었다.
갈라는 이미 엘뤼아르와 에른스트를 통해 당시 현대 미술의 동향과 그 발전 가능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달리가 그 중심에서 위대한 역할을 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녀는 그 후부터 달리의 영감을 끝없이 분출시키는 원천이자  동반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결혼으로 인해 달리의 아버지는 격노하고 부자로서의 인연을 끊기까지 했다.


 이에 반해 엘뤼아르는 갈라가 달리와 결혼한 이후에도 갈라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영원함을 고백하며 마지막 남은 재산까지도 처분하여 그녀의 새출발을 도왔으며, 죽을 때까지 갈라에 대한 어떠한 원망도 하지 않았으며 그녀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다 한다.....


 어린시절부터 유난히 소심했던 달리는 사람들의 관심을 갈망했으며 이전의 어떤 예술가보다도 더 유명해지기를 원했다. 
이런 달리에게 있어서 갈라는 영감의 원천, 애인, 엄마, 간호사 등과 같은 뮤즈의 역할을 했다.그녀는 스스로를 개성적 존재로서 성공적으로 팔 수 있는 자신감을 달리에게 심어줬다. 
 
 갈라와 달리는 서로를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둘 다 모호하면서도 자기 과시적이었고 어린 시절의 비밀로 괴로움을 받았으며 야심만만하고 탐욕스러웠다.
스스로를 신화화하고 시대정신을 직관해 대중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을 능력을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달리와 갈라는 한 시대를 완벽하게 풍미하는 예술가와 뮤즈상을 만들어냈다.
그 둘은 '라이프'지에 화려하게 등장하는가 하면 가십란에 활기를 불어놓았고 앤디 워홀과 허물없이 지내기도 했다. 

 


 

 

 

 갈라에게 정신적 의존도가 높았던 달리는 언제나 갈라를 추켜세웠다.
달리는 자신의 작품 곳곳에 갈라를 성녀(聖女)의 이미지로 신성화 시켰다.
갈라의 예지력과 초자연적인 재능은 그들 두 사람을 모두 평범한 걱정거리로부터 자유롭게
했고 그들을 불사신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 생활이 끝까지 행복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갈라는 나이가 들수록 '미소년'에 대한 취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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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햏햏 미소년 미소년 미소년 미소년 미소년 미소년 미소년 미소년 미소년 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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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아트 스타 '낸시랭'
2006/08/29 오후 12:05 | 현대미술

  
      모 통신사 광고에 나온 '낸시랭'

 현대 미술가에 대한 찬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엄청난 매출액과 함께 커가는 시장에 의해 촉진되었다.
19세기 말부터 생겨난 상업적인 화랑 시스템이나 대중 매체의 존재는 현대의 새로운 아트 스타를 만들어 낸 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공한 전문 예술가들과 달리 소수의 미술계 스타들은 그들의 직업이나 미술계를 뛰어넘어 유명해졌다.

 최근 국내에서 '낸시랭'(본명 박혜령)이 각종 대중매체의 러브콜을 받고있는 이유도 이때문이다.
지난주 방영된 '인간 극장'의 출연에 대해 네티즌들의 찬반 여론이 뜨거운 이유도 이미 그녀가 최소한 국내에서 만큼은 '아트 스타'임을 확실시 해주는 결과라 볼 수 있겠다.

 
 '인간 극장' 출연 장면들

 부자 집 무남독녀 외동딸에서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암선고, 어려워진 집안 살림으로 인한 가장으로서의 부담이 현재의 '낸시랭'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예술도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닳은 것이다. 

 국제적으로 가장 오래된 전통과 명성을 자랑하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된다는 것은 곧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보장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술 대학을 갓 졸업한 무명의 젊은 작가이던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초대받지 않는 꿈과 갈등'이라는 주제로 가부끼와 빨간색 비키니 차림으로 과감한 퍼포먼스를 벌였다.
어릴 적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자 했던 꿈과 좌절을 표현한 스스로의 무대를 만든 것이다.

 
 초대받지 않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의 '퍼포먼스'
 
 어찌됐든 그로 인해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낸시랭은 쌈지의 아트디렉터이자 케이블TV MC, CF모델 등으로 종횡무진하고 있다. 
최근엔 유명 명화들을 나름대로 해석한 '비키니 입은 현대 미술'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그녀가 탄생시킨 '낸시랭 라인'의 비즈니스 아트는 곧 바로 성공을 거뒀다.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들이 낸시랭 라인의 옷과 가방으로 코디를 하고 등장하면서 유행이 돼버린 것이다. 

 <낸시랭 라인>

 
 '거리낌 없는 솔직함'이 자신의 성공비결이라는 낸시랭...
 
   "저는 평범한 소녀들의 꿈을 이뤄주고 싶었어요. 나이가 들면서 어렸을 적 꿈이
    퇴색해버리잖아요.
    그 꿈이 다시 실현되길 바라는 마음을 작품 속에 담았는데 이 점을 여성들이
    공감해주신 것 같아요.
    제 별명이 '걸어다니는 팝아트'인데, 낸시랭 라인 '매직박스'(가방 이름)를 들고 다니면
    그 자체가 퍼포먼스가 되는 듯 해요."
 
   
낸시랭 라인의 로고 '터부 요기니(Taboo Yogini)'는 로봇의 몸에 어린아이의 얼굴이 합체돼
있다.  
로봇의 몸체는 차가운 자본주의 사회를 반영하고, 순수한 어린아이 얼굴은 아티스트의 순수함을 나타낸다.
인간과 신 사이를 연결하는 영적 메신저라는 의미로 퇴색된 꿈을 실현시켜주는 존재라고 한다. 
 
   <Taboo Yogini> 시리즈 
   


 

 

 

  

 하지만 자신의 작품과 세계관을 자본주의 사회와 결부시켜버린 그녀의 시도는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미술계에 달갑지 만은 않은 것이었다.
신선함에서도 그리 어필하지 못했다.
이미 한 물 간 미국 '팝아트'의 아류에 불과하다는 평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낸시랭'만이 아닌 현재 우리나라 젊은 미술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앤디 와홀의 '캠벨 수프통'을 차용한 작품




                                     앵그르의 '터키탕'을 패러디 한 작품

 
 많은 작가들이 패러디한 '최후의 만찬'에 예수의 모습에 자신의 얼굴을, 제자들의 자리에
 정제계 유명인사들의 얼굴을 삽입하였다.
 이미 영국의 유명 예술가인 '샘 테일러 우드'가 이러한 사진 작업을 하였다.

 음악이나 무용은 벌써 대중화됐지만 변화 속도가 느린 미술계에서도 더 이상 새로운 게 없어
화학반응을 느끼고 싶었다는 낸시랭은 자선파티도 주최한다.
자신처럼 경제적인 여건상 개인전을 갖지 못했던 젊은 아티스트를 위해 첫번째 개인전을 마련해 주고 후원도 하는 것이라고... 
 
 "저는 아티스트로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무엇이든 시도해 볼 거에요.
  자선파티를 통해 창조적이고 역량있는 작가들이 많이 배출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낸시랭. 사회적 반칙이 없는 공정한 이상사회에 대한 염원이 그 주제. 오른쪽은 퍼포먼스에 대한 작가의 간단히 설명. 아래는 이에 열광하는 관객들ⓒ2006 김형순


  <낸시랭 참여전시안내>

  
'Who are you'  삼청동 금호미술관(02-720-3162) 기획초대전

전시명 :  'Who are you.'展
전시장소 : 금호미술관
전시기간 : 07.21.2006 ~ 09.17.2006

낸시랭 퍼포먼스 : '스윙어(Swinger)' 
                           2006. 8. 5.(토). - pm 4:00

전시 오프닝 : 2006. 7.21.(금).
                   pm 5:00 ~ pm 7:00

참여 작가    : 권기수, 낸시랭, 박용식, 손동현, 신창용, 안수연, 이동기, 전경, 최병진


  자신이 팝아트의 아이콘이 된 낸시랭은 '터부 요기니(Taboo Yogini)' 시리즈로 유명한데
이번 전시회에는 '깊은 아픔'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천사와 악마 사이에서 방황하며 속은 부드러운 인간의 살을 지녔으되 겉은 남을 찌르는 금속의 창을 들고 있는 아픔을 뜻한단다.

 작품을 몸으로 구현하는 퍼포먼스도 있었다.
제목은 '스윙어(Swinger)'로 그녀 특유의 워킹으로 시작된, 분홍색 테니스 복장에 라켓을 들고 공을 받아치는 시뮬레이션이다.
공이 라켓에 닿는 제스처를 취하면 영상에 그려진다.
보통 때 별로 하는 운동이 없어 몸의 유연성은 떨어져도 전쟁터에 나갈 수밖에 없는 장군의 심정이지만 이런 수행이 너무 즐겁단다.
퍼포먼스 후에 자신의 사인이 들어간 테니스공을 나누어 주었다.

 작가는 이 퍼포먼스 주제를  "보다 공평한 사회를 염원하며"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은 그리 공평하지 않기에 스포츠에서처럼 반칙이 생기면 퇴출시킬 수 있는 공정한 정신, 진정한 스포츠맨십이 통하는 이상사회를 보고 싶단다.
그렇지만 사회는 처음부터 불공평한 점이 많은데도 무조건 평등해야 한다는 관점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낸시랭은 본인이 터부를 깬다기보다는 작품을 통해서 그런 것에 접근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작품의 연장선이라 한다.
자기 삶에 열렬한 참여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모두 함께 같이 이 즐거움을 나누는 것(Happy together)이 그의 작은 소망이란다. 

 또한, 그녀는 2006년 9월 15일부터 12월 까지 올림픽 공원에서 개최할 예정인 1천평 규모의
대형 미술관 '페이퍼테이너 뮤지엄'에도 참여할 계획이다.

 세속적인 것들을 작품 안에 받아들여 현재 한국의 '비즈니스 아트'를 확장시킨 낸시랭.
새털같이 가벼운 예술이 좋다지만, 아티스트이길 자부한다면 좀 더 깊이있는 주체성과 오랜
생명력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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