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소리를 내며 힘없이 부러지는 기내 식탁 손잡이, 창문에 부딪쳐 피를 튀기며 죽는 비둘기, 갈고리를 손에 든 남자의 그림자. 영화 <데스티네이션(Destination)>에 나오는 죽음의 엄습을 경고하는 징조들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이 정도로 ‘극적’이지는 않지만 그럴싸할 징조를 하나씩 앞세우기 마련이다.
죽음으로 향한 급행 열차인 중증질환도 마찬가지이다. 병이 본격적으로 발병하기에 앞서 신은 ‘전조(前兆)’라는 이름의 징조를 통해 중증질환으로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마지막 기회를 준다. 이러한 전조는 증상이 너무 가볍기 때문에 흘려보내기가 쉽다. 놓치기 쉬운 질환의 전조들을 살펴본다.
발음장애, 불투명한 시야-뇌혈관 질환
평소 건강만큼은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던 김모(62)씨. 얼마 전 친구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갑작스럽게 발음장애 현상을 느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음이 어눌해져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없게 된 것. 순간 당황했으나 10분 정도 지나자 증상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친구들이 병원에 가보라고 권유했지만 김씨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지나쳤다. 하지만 이 증상은 뇌혈관 질환의 ‘전조’였다. 김씨는 2주 뒤 발음장애와 하반신 마비 증상으로 응급실에 실려갔고 뇌경색 진단을 받게 됐다.
뇌출혈, 뇌경색 등 뇌혈관 질환의 전조로는 갑작스럽게 한쪽 얼굴, 팔, 다리 등에 힘이 빠지고 한쪽 눈의 시력이 나빠지고 발음이 꼬이는 증상 등이 있다. 또 평소와는 다른 양상의 두통, 어지럼증도 뇌에 이상이 생겼다는 주요한 징조들이다.
세란병원 신경과 채승희 과장은 “통계적으로 뇌졸중 환자의 22%정도가 발병 전에 어지럼증을 느끼는데 대체로 이를 무시하고 병을 키운다” 며 “눈을 감고 누워 있는데도 어지럽다거나 사물이 두 개로 보일 때, 한쪽 눈이 흐릿한 증세가 보인다면 뇌졸중의 전조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시급한 응급처치를 요하는 심장병도 발병하기에 앞서 전조현상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독일 베를린 대학 의과대학 연구팀이 미국심장학회(AHA) 학술지 ‘순환’ 에 지난해 발표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심장마비가 일어나기 1시간 정도 앞서 대부분의 환자가 갖가지 전조증상을 경험한다.
급성(急性) 심정지 환자 406명의 자료를 분석해 만들어진 이 논문은 환자 75%가 쓰러지기 전 최소 5분에서 120분까지 흉통, 호흡곤란, 구토, 현기증 등을 호소했다고 설명한다. 심장마비의 전조를 경험하지 않은 환자는 결국 4명 중 1명에 불과하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주의 깊게 살핀다면 명부(冥府)의 문을 닫고 돌아설 기회가 충분하다는 뜻이다.
이유 없는 빈혈, 멍든 증상-골수질환
당뇨가 있는 주부 유모(58)씨는 얼마전부터 몸이 예전과 달리 더 피곤하고 잇몸에서 피가 쉽게 났다. 코피도 한번 터지면 오래 쏟아졌고 걷다가 식탁에라도 부딪치면 멍자국이 어김없이 남았다.
그러나 유씨는 그저 별일 아니겠거니 하고 진단 받기를 미뤘다. 결국 뒤늦게 방문한 병원에서 유씨는 적혈구 수치가 정상치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조혈 모세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골수형성이상증후군(Myelodysplastic syndrome)이라는 이름마저 생소한 혈액병 진단을 받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백혈병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중증질환이다.
골수형성이상증후군은 당뇨나 고혈압처럼 흔하게 진단되는 질병은 아니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발생빈도가 가파르게 상승한다. 아직 정확한 발병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유병률에 관한 국내 통계도 없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인구 10만명당 60대에서는 16명, 70세 이상에서는 52명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환자 수가 상당하다.
문제는 대부분 노년층인 환자들이 증상을 ‘단지 피곤해서‘‘나이가 들어서’라는 간단한 이유를 들어 무시한 채 병을 키운다는 것이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 혈액종양 전문클리닉 민유홍교수는 “골수형성이상증후군은 만성피로감, 계단을 오를 때 숨찬 증세, 어지럼증이 나타나며 외상이 없는데도 쉽게 멍이 들고 코나 잇몸에서 출혈이 잦게 일어나는 전조가 분명하게 나타난다”며 “그런데도 사회적으로 병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병을 키운다”고 말했다.
민 교수는 “증상이 있더라도 진단이 안된 잠재적 환자군이 많은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심상치 않은 빈혈증상이 계속되면 하루 빨리 병원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갑자기 쉰 목소리 2주 지속-후두암
흡연과 관련있는 질환의 전조 두 가지. 흡연이 발기부전을 유발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으며 흡연자가 비흡연자에 비해 발기부전을 경험할 가능성이 50%나 더 높다는 보고도 나온 지 오래다.
핀란드 탐페레 대학의 쉬리 박사 연구팀은 올해 초 흡연자의 발기부전을 연구한 논문을 통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발기부전은 혈관병의 전조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담배를 피운다면 얼굴의 변화에도 신경써야 한다. 영국의 한 연구재단은 ‘갑자기 얼굴에 주름이 많아지는 흡연자는 심각한 폐질환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경계하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한 적도 있다.
목소리를 만들어주고 식사 때는 폐로 음식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성대에 병이 생길 때도 어김없이 전조가 울린다. 전문의들은 서서히 쉬는 목소리는 별문제가 아니지만 만일 갑자기 심하게 쉰 목소리가 2주 이상 지속되면 정밀 진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후두암, 갑상선암, 폐암, 뇌나 심장 이상의 징조라는 설명이다.
[한국일보] 양홍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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