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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이모저모/다큐멘터리 및

"중국의 백만 군대가 못한 것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 냈다." - 장제스

by 현상아 2007. 8. 15.

 중국 상하이에 있는 항일운동 유적지 

 

일제시대 3·1운동이 일어난 후 광복을 위해 임시로 중국 상하이에 선포한 정부가 활동하던 임시정부청사입니다.

 

당시 국내에서는 일재의 탄압이 심했기 때문에 가까운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하이는 서양에 개항 되면서 대도시가 되었고 외국의 조계인 지역도 있었기 때문에

외교활동 뿐만아니라 일본이 간섭하기가 쉽지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외진 골목길을 따라 어렵게 발견한 임시정부 유적지 현재 모습

 

생각보다 작고 낡은 건물이네요... 이곳은 3층 벽돌집으로,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 직후까지청사로 사용하던 곳입니다. 창문열린 방은 김구선생 집무실입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중요한 업무를 했던 집무실 내부입니다. 

 

 

낡은 태극기는 참 많은 것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26년 7월부터 1932년 4월까지 임시정부 청 사로 사용한 역사깊은 장소이다.

이 청사는 한.중양국의 협조로 이곳을 떠난 지 60여년만인 1993년 4월 13일 1차 복원하였고,

2001년 2월 건축물을 전면 보수하고 전시 시설을 확장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유적지로 단장하였다." 

 - 임시정부 기념비문 中 -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  백범일지 中 -

 

 

 

 

 

그럼 승전 경축행사를 하고 있던 일본군들을 폭사시키며 조국 독립의 의지를 알렸던 유서 깊은 홍커우 공원으로 향합니다.

 

 공사판(?)의 욘사마를 비롯해 많은 대한민국 현재인들을 뒤로하고 이동합니다. 

 

 

 

 1932년 4월 29일, 이곳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안타깝게도 매헌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엔 중국의 문학가 루쉰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정표 하나 제대로 없어서 많은 시간을 공원에서 헤매다 어느 노인이 연주하는 '아리랑' 음악듣고 겨우 찾았습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 전시관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들 계십시오." 

 

- 윤봉길 의사 유서 中 -

 

 지금까지 우리는 도시락 폭탄만 알고 있었는데, 도시락은 자결하기 위한 폭탄이고, 실제는 물통으로 위장한 폭탄을 던졌다고 한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을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 두 아들에게 쓴 자필 유서 中 -

 

최근 임시정부 세력도 탈레반과 같다고 말씀하신 강정구 교수와 김구선생을 빈라덴과 같은 테러리스트라고 비유한

지만원 소장 및 일부 극우 분들, 왜곡된 역사를 알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아래 글을 보여주고 싶네요.      

 

 

"23세,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우리 압박과 우리의 고통은 증가할 따름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각오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뻣뻣이 말라 가는 삼천리 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수화(水火)에 빠진 사람을 보고 그대로 태연히 앉아 볼 수는 없었다.  여기에 각오는 별것이 아니다.

나의 철권(鐵拳)으로 적(敵)을 즉각으로 부수려 한 것이다.  이 철권은 관(棺)속에 들어가면 무소용(無所用)이다.

늙어지면 무용이다. 내 귀에 쟁쟁한 것은 상해 임시정부 였다.

다언불요(多言不要), 이 각오로 상해를 목적하고 사랑스러운 부모형제와 애처애자와 따뜻한 고향산천을 버리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 잡고 압록강을 건넜다."

 - 출사표 中 -

 

 

 

              사람은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한층 강의(剛毅)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길을 택하였다

 

- 봉길 의사의 어록 中 -

 

장제스 대만 전 총통이 1967년 윤봉길 의사 유족들에게 전달해준 친필 붓글씨

윤 의사 의거로 인해 독립군은 당시 중국국민당 장제스정부의 지원을 받을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백만 군대가 못한 것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 냈다."   - 장제스 -

 

 

 윤봉길 의사, 마지막 최후 순국장면입니다. 총알이 이마를 관통한 모습은 가슴을 숙연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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