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뿌리가 된 세계최초의 문자 녹도문
고대문명의 중요한 조건이 문자의 사용이다. 문자는 살아있는 유물이다. 살아 꿈틀거리는 고대유물인 동시에 그 변천 과정이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을 포함한 우리 나라의 고대사회에서 일찍이 문자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BCE 2000~1500년경의 도화문자(圖畵文字)) 동아시아지역에서 문자가 창제되기 전에는 주로 결승문자(結繩文字: 노끈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다. 이것은 남미 인디언, 잉카제국에서도 통용되었다.
고조선이 개국되기 훨씬 전인 신시배달 건국 때부터 우리 민족은 이미 문자생활을 영위하였고 그 종류도 다양했다. 배달국 환웅천황은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 神誌文字)을 창제하였다. BCE 39-38세기경에 창제된 이 녹도문은 이집트 상형문자(BCE 3000년경), 수메르 설형문자(楔形文字: cuneiform script, BCE 3000년경)보다 몇 세기 앞서는 세계최초의 문자다. 환단고기「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 기록에 보면 환웅천황께서 신지(神誌: 벼슬이름)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써 천부경을 기록케 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녹도(사슴 발자국 모양)란 문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왼쪽부터 낭하리 고각, 영변지에 실린 녹도문, 창힐문자, 요녕성 여대시 윤가촌에서 출토된 고조선 토기의 문자, 은나라의 갑골문
이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위 그림 맨 왼쪽의 낭하리 암각화다. 환단고기에 인용된 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하였다.
그 개량된 형태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다. 환단고기의 저자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은 것이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립 옹도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라고 밝히면서 신지 전자(篆字)를 소개해 놓았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의하면 5세 태우의 환웅천황의 막내아들 태호 복희씨가 녹도문을 개량하여 용서(龍書)를 만들고 이것을 주양(朱襄)씨가 육서(六書)로 남겼다고 한다(朱壤仍舊文字而始傳六書). 이것이 이른바 삼황오제시대의 상고금문(上古金文)이다.
참고로 ^^)... 금문(金文)이란 문자가 창안된 역사시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각종 나무류와 동물의 껍질, 뼈다귀, 돌, 금속에 새겨진 글자를 총칭한다. 시대별로 상고금문(上古金文?五帝金文: 삼황오제시대로부터 하(夏)왕조 때까지의 문자), 은주금문(殷周金文: 은(殷)나라 갑골문, 주나라 대전(大篆)), 춘추금문(春秋金文: 진시황 때의 소전(小篆))으로 나눌 수 있다.(김대성 엮음, 금문의 비밀, 27-28쪽)
최근 중국 곳곳에서 은나라 갑골문 이전의 문자들이 발굴되고 있는데 이것을 집중 연구한 중국학자 낙빈기(駱賓基)는 자신의 저서 금문신고(金文新攷)에서 상고금문이 한민족의 언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실을 밝혀내고 그 문자들을 만들어 사용한 주체가 한족(漢族)이 아니라 동방 조선족이라고 단언하고 있다.(김대성 엮음, 금문의 비밀 참고) 상고금문은 은(殷)나라의 갑골문(甲骨文), 주(周)나라의 대전(大篆), 진(秦)나라의 소전(小篆)을 거쳐 한조(漢朝) 때 한자(漢子)로 완성되었다.
배달국에서는 숫자로서 산목(算木)이 통용되었고 14세 자오지 환웅천황 때는 화서(花書: 佃目)가 만들어져 사용되었다(바로 아래 그림).
자오지 환웅천황의 동방통일전쟁이 끝난 뒤에는 이전부터 개량돼오던 신지문자(녹도문)가 중원에도 전해졌는데 이것이 바로 창힐문자(倉?文字: 鳥跡書)다. 현재 창힐의 고향 백수현 사관촌(산동반도 지역)에서는 창힐문자가 발견되고 있다. 위 사진의 중간에 있는 창성조적서비(倉聖鳥跡書碑)에 새겨진 글이 창힐문자다.
창힐은 헌원의 신하로 새 발자국을 보고 문자(鳥跡書)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자오지 환웅천황의 제후로서 배달국 문자(鹿圖文)를 서방에 전하여 동서문화 통합을 시도한 동이족이었다. 창힐문자가 배달국 녹도문과 모양이 같은 것은 이 때문이다.
창힐문자는 복희?주양씨 이래 중원지역에서 사용되던 옛 문자(六書)와 뒤섞여 은나라 갑골문의 뿌리가 되었다.
갑골문자는 동이족인 은나라 사람이 만들었지만 현대 중국어의 어순과 비슷하다고 한다. 당시 중국은 화하족(중국 한족)과 동이족이 융합되는 과정에서 한족(漢族)의 언어체계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사서의 고전(古典)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은나라가 망하고 은나라 왕실의 기자(箕子)가 은나라 유민을 고조선으로 도망쳐 왔다고 하며 지금의 난하유역에 정착했다. 그는 갑골문자를 들고와 유통시켰다. 고조선에서 사용되던 신지문자보다 개량된 다소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고조선에는 별도의 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다. 하나는 가림토(加臨土)문자, 하나는 신지문자다. 요녕성 여대시 윤가촌에서 출토된 토기의 접시부분에는 고조선시대에 사용되던 신지문자(녹도문)가 새겨져 있다.그런데 서토지역과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갑골문 및 주(周)나라의 대전(大篆: 갑골문을 개량한 주나라 문자) 사용이 빈번해지자 한수(漢水)사람 왕문(王文, BCE 9C)이 부예(符隸)를 만들고 BCE 865년 천왕에게 건의하여 삼한에 이두법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중국은 BCE 8세기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열국 제후들의 노력으로 산업생산량과 교역이 더욱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다. 자연 고조선과의 교역량도 급증하게 되면서 한자가 동아시아의 공용문자가 되었고 가림토문과 신지문자는 점차 소멸되었다.
한글의 원형은 고조선 가림토문자
21세기의 벽두, 우리 나라는 정보화시대의 선진국 지위를 자리 매김 했다.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은 정보화 속도에 있어서 우리 나라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데 다름 아닌 한국인이 사용하는 한글의 우수성과 편리함 때문이다.
컴퓨터 자판을 보시면 왼손은 자음 오른손은 모음을 치게 되어있다. 한글은 왼손(陰), 오른손(陽)을 번갈아 가면서 아주 빠른 속도로 타이핑이 가능하며 그 어떤 문자도 이것을 따라올 수 없다. 일본의 히라까나 가타카나나 한자를 키보드로 입력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지는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다. 외국인들을 상대로 우리 한글을 가르치면 불과 40분만에 한글로 표기한다고 한다. 영어 알파벳 다 배우는데는 며칠이 걸리고 한문은 평생을 공부해도 다 알기 어렵다. 또 휴대폰을 보면 천지인 삼재를 형상한 ?ㅡ ㅣ 세 개면 모든 모음을 표기할 수 있다. 세계 어느 문자도 감히 이것을 흉내내지 못한다. 삼재(三才)와 오행(五行)의 우주원리가 담긴 한글은 서양의 알파벳보다도 월등히 우수한 세계 최고의 문자다.(민족 종교 증산도의 경전인 증산도 도전에서는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말과 글을 세계인들이 배워 통어케 되며 한자는 간단하고 쉬운 것만 사용하게 된다"고 적고 있다)
단군세기 3세 단군 가륵(嘉勒)조와 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을 보면, 단군 가륵 2년(BCE 2181)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이 정음 38자(字)를 창제했다는 기록과 함께 글자의 형태를 소개하고 있다.
이것도 참고하시라 ^^)... 조선 선조때 조여적(趙汝籍)이 지은 청학집(靑鶴集)에 그의 이름이 실려있음돠.
그런데 ‘가림토(加臨土)’ 또는 ‘가림다(加臨多)’라고 불리는 이 글자의 모습은 세종 때 창제된 한글의 형태와 매우 흡사하며, 일본의 쓰시마섬(對馬島)과 큐우슈우(九州)의 신궁(神宮)에서 자주 발견되는 아히루문자(阿比留神字, 神代文字)와도 유사한 점이 대단히 많다. 그리하여 일본의 학자들 대부분은 아히루문자(신대문자)가 조선으로 건너가서 한글의 원형이 되었다는 망언을 하기도 한다.
세종실록 25년 12월조에 “이 달에 임금께서 언문 28자를 지으시니 그 글자는 고전을 모방하고 있다(其字倣古篆)”라고 하였고, 최만리의 상소문에도 “글자의 모습은 옛 전문을 모방했지만 음을 쓰는 것과 글자를 배합한 것은 다 옛것과 반대이다(字形 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라 하여 예전의 전서를 모방했음을 밝히고 있다. 한국의 한글학자들은 훈민정음의 창제가 독창적이었다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여, 여기에 나오는 옛 전문을 몽고 파스파 문자(蒙字)나 한자(漢子) 자체(字體)의 하나인 전서(篆書) 또는 범자(梵字, 산스크리트 문자)를 모방한 것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몽고문자나 전서, 범자와 닮은 데가 전혀 없다. 인류문명사에서 한글처럼 고도의 체계를 가진 문자가 어느 날 갑자기 한 인물에 의해서 발명된 사례는 지구촌 어디에도 없다. 한마디로 이 나라 한글 학자들의 주장은 역사발전법칙도 무시한 터무니없는 억설일 뿐이다.
가림토 문자는 고조선시대와 열국시대 초기에 한민족이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현해탄을 건너갔다. 일본 역사의 초창기를 일본서기에서는 신대(神代)라고 부른다. 이 무렵에 일본열도로 유입된 문자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신대문자라 부르고 있다.
일본의 수많은 신사(神社)에는 신대문자가 새겨진 명문과 비석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의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는 고사기(古事記)는 백제인 태안만려(太安麻呂)가 완성한 것인데 원래는 위의 사진처럼 신대문자로 표기된 것이었다.
가림토 문자는 기원전 21세기경 인도로까지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송호수 교수가 인도 구자라트 지방(인도 서북부지역)에서 그 지역 사람들이 사용하는 문자가 한글과 거의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국내에 보고한 바 있다. 여기에 많은 학자들이 주목했다. 오늘날 구자라트주에는 주로 드라비다인(Dravidian)들이 거주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까지도 우리와 흡사하다고 한다.
가림토 문자가 인도로 건너간 계기는 무엇일까?
부도지에 따르면 순임금의 부친 유호(有戶: 고수)씨가 그 무리를 이끌고 월식(月息)?성생(星生: 인도로 추정됨)의 땅으로 들어가 교화시켰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을 끈다. 단군세기에 의하면 5세 단군 구을 임금 때 신독(身毒: 인도)사람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했다고 한다. 당시 인도에는 게르만계 백인인 아리안족이 아닌 인더스문명의 주인공 드라비다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지중해 인종(그리스인)과 유사한 혈통과 신화를 갖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드라비다인의 프로메듀 신화와 동일하다고 한다. 아울러 거석문화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인도 서북부 구자라트에 사는 드라비다인은 최근의 연구결과 한국인과 공통의 유전자가 발견된다고 한다. 다른 드라비다인과 달리 언어까지 비슷해서 무려 6백 개가 넘는 단어가 같다. 그 실례를 든다면 ‘엄마, 아빠, 오빠, 다리, 벼, 메뚜기(드라비다어 메디), 쌀’ 등이다. 여기서 ‘쌀과 메디, 벼’라는 단어는 고조선과 인도지역간의 농경문화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게 한다. 문제는 벼농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느냐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기원전 3천 년경에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이 이미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
국가 | 도읍지 | 동방 고대 문자의 계보 |
배달 | 신시 | 신지(神誌) 혁덕(赫德)의 녹서(鹿書, 녹도문, 낭하리의 암각) 산목(算木) 사용 → 부여의 서산(書算)으로 계승 태호 복희의 용서(龍書, 육서(六書)의 원리가 제정됨 → 이른 바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의 상고금문(上古金文), 갑골문과 한문의 먼 뿌리 한문), 최근 출간된 금문신고(金文新考)에서 상고금문을 사용한 주체가 한민족이었음이 드러남(김대성 엮음, 금문의 비밀 참고) |
청구 | 치우천황의 화서(花書, 이른바 鬪佃目) 창힐(倉?)이 배달국 신지문자를 배워 중원에 보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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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 아사달 | 신전(神篆, 녹서를 계승한 문자, 이른 바 요녕성에서 발굴된 고조선 토기문자) 사용 가림토(加臨土)문자 → 3세 가륵 단군 때(BCE 2181년)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이 지은 원시한글. → 일본의 신대(神代)문자가 됨, 훗날 세종대왕에 의해 훈민정음으로 재현됨 은(殷)나라에서 상고금문을 계승한 갑골문자(甲骨文字)를 사용. 한자의 기원이 됨 |
백악산 | 중원지역과의 교류가 확대되고 은(殷) 왕실의 기자(箕子)가 고조선으로 망명하면서 고조선에 갑골문자가 유통됨 주(周)나라 대전(大篆) 한수(漢水)사람 왕문(王文, BCE 9C)이 부예(符隸)를 만들고 BCE 865년 천왕에게 건의하여 삼한에 이두법을 시행함 가림토문자가 BCE 7세기경 일본의 건너감 → 일본의 신대(神代)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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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당경 | 신지문자와 가림토와 한문이 병존하다가 한문(이두법 사용)으로 일원화됨 | |
북부여 | 진(秦)나라의 소전(小篆) 진(秦)나라의 정막(程邈)이 부여(숙신)에 사신으로 와서 한수(漢水)에서 얻음 → 예서(隸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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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시대 | 한(漢)나라 채옹의 팔분(八分), 한예(漢隸) 후한(後漢)의 왕차중(王次中, 왕문의 후손)이 개량 → 해서(楷書) |
경기도 일산과 청원군 소로리 등지에서 출토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는 야생벼가 아닌 농경의 흔적이었다.
알아둬염 ^^)..... 최근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일대는 지난 97년 11월부터 98년4월까지 5개월간 충북대, 단국대, 서울시립대 박물관이 참여하여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한바 있다.
그 결과 구석기 유적이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고 특히나 지하 1.3m 토탄층에서 20여알의 볍씨가 출토돼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볍씨는 탄소 연대측정결과 1만3천년~1만7천년전의 것으로 최근 밝혀졌다. 이는 세계 최고(最古)의 볍씨로 기록된다. 중국 양자강 유역의 하모도(河姆渡)유적 볍씨는 7천년전이고 회하(淮河)의 볍씨는 8천5백년 정도다.
소로리 볍씨는 이보다 훨씬 이전이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5천년전의 경기도 일산 볍씨 기록을 갈아 치웠다. 이 볍씨가 재배벼인지, 야생벼인지는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이중 일부는 재배벼의 흔적이 있다. DNA 분석결과 「고대벼」라 불리는 이 볍씨는 현재의 재배벼와 약 40%정도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만약 이 볍씨가 재배벼라면 우리나라 농경문화의 역사는 대폭 수정해야 할 정도다.
따라서 고조선인들이 인도로 건너가 일부지역에 정착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도 구자라트 지방에서는 아낙네들이 빨래 방망이로 세탁을 하는 모습, 조랑말 같은 조그만한 말들도 보인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고조선의 풍속과 과하마(果下馬, pony)가 건너갔기 때문이다.
이처럼 까마득한 고조선시대부터 우리민족은 멀리 인도와도 교류하고 있었다. 충청도 제천지역의 고인돌에서는 드라비다인으로 추정되는 장두형 인종의 인골이 발견되기도 했다. 우리민족은 이처럼 오래 전부터 국제화?세계화의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인도 구자라트문자는 훗날 산스크리트 문자의 일부로 변형되었고 이것은 다시 티벳문자가 된 뒤 원나라 승려 파스파에 의해 몽골문자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조선시대 몇몇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범자(梵字)나 몽자(蒙字)라 착각한 것이다.[한글날특집]새시대의 세계공용어, 한글
한글의 기원은 가림토 문자
고조선 3대 가륵단군 (김산호 화백 그림) |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들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 선포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 전해진 것으로 한글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단군 시대에 만들어진 유서 깊은 글자다. 정확히 말해 단군3세 가륵임금 때인 B.C 2181년에 정음 38자를 만들어 ‘가림토(加臨土)’ 문자라고 명명하여 발표한 것이 그 시초다.
▶가림토문자 소개
배성근
1.가림토문자란?
2.가림토문자의 역사적 근거
3.가림토문자 풀이
4.가림토문자의 역사적 의의
1.가림토문자란?
1) BC 3898 ~2333년 사이에 한반도에는 배달국이 있었는데
배달국 에서는 사슴의 발자국을 본떠서 만든 녹도문자가 있었다.
이 녹도문자는 음문자이며 만물을 형상화한 뜻글자로서
완전한 문자체계가 이루지 못하여 불편한 점이 많았다.
▲ 신지녹도문자 천부경 진본
2) BC 2333년 단군조선이 건국되었고 BC 2181년 3대 갸륵단군에 이르러
녹도문자의 불편한 점을 개선코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38자의 문자를 만드니 이것이 바로 가림토문자이다.
가림토문자를 만들면서 갸륵단군께서 하신 말씀은
"아직 풍속은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진서(眞書)가 있다하여도
열 집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3) 가림다는 우리말소리가 가진 뜻에 관리 통제하여 일치시킨
소리글(표음문자)이면서 동시에 뜻글(표상문자=표의문자)이다.
가림다의 글씨(글자 하나하나) 디자인은 사물의 구체적 형상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간의 관계법칙을 내포하는 개념을
상징하는 기하학적 형상이다.
4) 훈민정음은 이 음성기호적 기능을 살리고 28자로 축약한뒤
모아쓰기형태의 용음합자방식으로 바꾸어 세종대왕에 의해
재 창제된 것이다.가림다는 38자이며 풀어쓰기 방식이다.
▶융음합자방식이란:
소리가 나는 대로 문자를 합자하여 조합형의 글자를
만드는 방식을 뜻함. 한문은 표의문자로 구분되며,
한글과 영어는 표음문자 즉 소리글자이다.
합자방식을 사용한 문자는 한글과 한문이 대표적이다.
가림토문자와 영어는 풀어쓰기방식으로 사용하며
영어는 현재도 풀어쓰기 형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보기>ㅁ ㅣ ㄴ ㅈ ㅗ ㄱ ㅁ ㅜ ㄴ ㅎ ㅏ ㄱ
5) 해외에 남아있는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은 일본의 신대문자,
몽고의 "파스파 문자, 인도의 산스크리스토 알파벳 과
구라자트 문자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2.가림토문자의 역사적 근거
가) 세종 23년에 발표한 세종실록 103권에는 "非新字也"라고 나와있음.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
나) 세종실록 25년 ;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첫 발표문에는
-이 달에 상감께서 친히 스물여덟자를 지으시니,
그 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한 것이다.
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하자 최만리등이 반대하는 글을 올리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근본 삼은 것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며 곧 자형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했더라도 용음과 합자가 전혀 옛 것과 반대되는 까닭에 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바입니다.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用音合字盡反於古實無所據)
▶전조선때부터 전해오는 언문 을 빌려 쓰신 것이긴 하지만, 지금은 한자를 써야 할 때인데 어찌 지나간 것을 따르려 하시오니까?
(借使諺文自前朝有之以今日文明之治變魯至道之意尙肯因循而襲之乎)
▶언문은 한자와는 서로 아무런 상관됨이 없는 시골 것들이 쓰는 말일뿐이옵니다.
(諺文與文字誓不干涉專用委巷俚語者乎) ▶당시 세종대왕은 한글을 [훈민정음] 이라고 발표했지 [언문] 이라고 한 적이 없다.
최만리등의 말에서 보듯이 [훈민정음창제] 이전에 이미 예로부터 전해오는 [언문]이라는 것이 있었고 백성들이 그 [언문]을 쓰고 있었으며 [훈민정음]은 그 언문의 모양을 본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라) 조선 세조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28자의 근본이『징심록』의 가람토문 에서
취해졌다”고 말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마) 압록강 위쪽 고구려의 옛 수도 집안근처에서 발견되는 토기 중에는 가림토문자, 녹도문자, 한문이 동시에 쓰여 져 있는 것이 발견된다고 함.
바) 가림토 문자는 고려 공민왕 때인 1363년 이암(李巖)이 저술한
'단군세기'에 제3세 단군 가륵이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었다고 기술되어있음.
사) 조선중종� 학자 이맥(李陌)의 『태백일사』「소도경전 본훈」에는
“한문이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가림토(加臨土)라는 옛 글자가 있어 모두 이 문자로 기록을 했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음.
아) 경북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명마산 중턱에 있는
바위(가로1.8m,세로3.4m)에서 가림토로 추정 되는 문자 다수가
새겨진 것이 발견 되었다.
이 바위에는 상형문자에 가까운 글꼴이나,ㅅ ㅈ ㄴ ㅠ 등
한글 자모가 뚜렷이 각인 되어 있으며 재야 사학자인 예대원 씨는
'훈민정음 창제의 모태이자 기반이 된 것으로 알려진 가림토 문자가
확실하다'고 주장함.
▲ 경북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명마산 중턱에 발견된 바위 가림토문자 추정되는 문자가 있음
자) 삼천포 남쪽에 있는 남해섬에는 우리 나라의 고대 문자로 추정되는
'남해각서’가 있는데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탁본을 하여서 바위가 새까맣게 먹물에 젖어 있음. 위당 정인보는 “우리 나라의 문자는 옛날부터 있었다. 지금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신시(神市)의 고각(古刻)이 있다.”고 기술함. 단군 연구에 최고 권위자인
한국정신문화원 박성수(역사학) 명예교수는 남해각서를 보고 '바위에 암각된 문자가 가림토와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연구검토를 거쳐 가림토 여부를 판명해야 할 것'이라고 피력함.
차)언어학자 박대종씨가 동방문자(漢子)의 기원인 갑골(甲骨)문으로 쓰여진
우리 선조의 유집 "농은유집(農隱遺集)" 천부경(天符經)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갑골문의 뿌리가 단군조선 이전인 환웅 (桓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밝힘.
카)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을 가능케 한 고대 이집트 비석
로제타석(BC 205~180) 에는 맨 위에 이집트 상형문자,
중간에 이집트 민용문자, 맨 아래에 그리스 문자가 쓰여져 있고,
고구려 옛수도 집안근처에서 발견되는 토기중에는 가림토문자, 녹도문자,
한문이 동시에 쓰여진 것이 발견 되는데.
이는 로제타석 보다 훨씬 오래 된 것으로 추정함.
3.가림토문자 풀이
가림다 38자 중에 근간이 되는 중심 글자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여
해석을 달지 못한 자음과 모음에 대한 해석은 계속 연구 되어야한다.
A.한겨레의 전통사상인 삼태극/삼일사상에 의한 가설
※ 삼태극 해설
▶태극기는 고종때 최초로 국기를 만들었졌는데
최초 국기가 삼태극 문양이다. 이 문양은 고대부터 사용되어져
왔으며 이를 근거로 유추한 사상을 삼태극 사상이라고 한다.
▶삼태극에서는 신기한 힘이 흐르고 있다고 한다.
적·청·황색의 삼태극이 상징하는 하늘·땅·사람은 각각이면서
하나이고, 삼태극은 천지인 (하늘·땅·사람)이라는 뜻이 있다.
하늘과 땅이 아직 나누어지기 전에 태극에서 음양(陰陽)이 생겼다.
음양의 조화에서 오행(五行)이 생겼다.
▶적·청·황색의 삼태극이 상징하는 하늘·땅·사람은 각각이면서
하나이고, 그 가치 또한 동등하고. 태극의 음(陰)과 양(陽)이
화합하여 완전한 원형을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땅·사람이
모여 우주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극과 삼태극은 모두 우주를
상징한다.
▶천지인 3재의 조화사상은 삼태극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괘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상층의 효는 하늘, 중층의 효는 사람,
하층의 효는 땅을 상징하면서 천지인 3효가 하나의 괘를 이루고
있다. 물론 효 역시 음과 양으로 괘 역시 음과 양으로 나누어진다.
음양의 태극은 빨간색이 양을 나타내고 파란색이 음을 나타낸다.
▶1882년 8월 9일 특명전권대사(特命全權大使) 겸 수신사(修信使)인
박영효(朴泳孝) 등 일행이 인천에서 일본배를 타고 도일할 때,
그 동안 구상되고 논의되어 어느 정도 찬성을 본 국기의 도안
내용을 다소 수정한 태극사괘(太極四卦)의 도안이 그려진 기를
국기로 게양할 것에 의견을 모으고
일본 선박 메이지마루[明治丸]에서 이것을 만들었다.
▶1883년 1월(음) 고종은 왕명으로 태극도형과 4괘가 그려진
국기를 공식으로 제정·반포하였다.
▶1883년(고종 20) 조선의 국기로 채택되고,
1948년부터 대한민국 국기로 사용된 것이다.
1.닿소리글자 (자음)
○;없음(0)을 상징한다. 없음은 있음이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 (1)이고, 있음과 하나(1)이다. 따라서 있음도 하나(1)이다.
이 하나인 없음에서 모든 것 있음이 나온다.
하늘(선천>짐천>후천)에서 나온 개념이다. 없음에서 처음 나오는
흐름이 0.ㄹ(=ㅇ.ㄹ=얼/알의 가림다 표현)이며, 후천에서
하늘은 0.ㄹ과 하나이니 보이지 않는 0.ㄹ 을 상징하기도 한다.
ㆆ(=ㅎ);빛 있음=밝음과 따뜻함을 상징한다. 선천의 불(火)과 같은
해(日)에서 나온 개념이다. 선천이라 함은 지구생성 전의 우주의
시공간를 말하며, 짐천은 지구생성 과정의 시공간이고, 후천은
지구생성 후 지구 대기권/ 대기막 내의 하늘이다.
□;○에 상대적인 개념으로 물질(ㅇ.ㄹ_ㅁ) 있음을 상징한다.
닫혀있음, 뭉쳐있음, 나뉘어짐 등의 뜻/성질을 가진다.
ㄴ;□의 처음끝(있음)의 뜻/성질을 가진다.
ㄱ;□의 마지막끝(있음)의 뜻/성질을 가진다.
ㄹ;ㄴ에서 ㄱ로 이어짐(있음).이음, 흐름 등의 뜻/성질을 가진다.
工;가림다에서 ㄷ으로 있음이 없음을 두름(있음)의뜻/성질을 가진다.
∪;가림다에서 ㅂ으로 가운데 선이 없는 모양, 즉 ㄷ이 선 형태로
비어있는 기학학적 형상. ㄴ이 ㄱ으로 닫히고 막히어 채워진 ㅁ이 되기 전의
빔(있음). 빔에서 채움, 즉 받음 등의 뜻/성질을 가진다.
ㅋ;끝이 새로이 생겨 커짐(있음)의 뜻/성질을 가진다.
△;○과□이 서로 소통되는 생명(ㅇ.ㄹㅣㄹ.ㅇ) 있음을 상징한다.
생명은 없음에서 있음으로 있음에서 없음으로 되는 것인데,
생명은 있음과 없음이 하나로 있음을 상징한다.
ㅅ;생명이 섬. 서있음. 솟음, 세움, 섬 등의 뜻/성질을 가진다.
ㅈ;솟음을 누름. 죽음, 죽임, 지움 등의 뜻/성질을 가진다.
ㅊ;지움을 뚫고 치솟음. 치솟음, 침 등의 뜻/성질을 가진다.
2.홀소리글자 (모음)
. ; 없음에서 있음으로 있음에서 없음으로 되는 점(있음/없음)의
뜻/성질을 가진다.
_ ; 솟지 못한 물질 있음/ 생명 없음의 뜻/성질을 가진다.
ㅣ; 있음(1). 솟은 생명 있음(1). 나눌 수 없는 하나(1)의 있음의
뜻/성질을 가진다.
B.환단고기를 위서로 단정하는 집단의 주장.
-일본 대마도의 아히루 문자가 훈민정음의 근본이라고
주장하다가 여러가지의 역사적 증빙근거로 일본이
철회하였으며, 이제는 가림토 문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강도가 미약해졌으나 만든 과정을 저급하게 추정함.
"가림토문자는 자연, 만물의 기본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표시한 것에 불과하다"
이 말은 이집트 상형문자처럼
저급한 수준을 의미.
▶환단고기에 대하여
ㄱ.환단고기나 규원사화 등은 흔히 고기류(古記類)에 속하는 야사.
규원사화가 17세기 조선 숙종대를 전후하여 쓰여진 야사임에
반해 환단고기는 19세기 이후 쇄국과 개항에 따른 국난시기에
쓰여진 야사로 사료됨.
ㄴ.환단고기는 삼성기(상,하)와 단군세기, 그리고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묶어서 한 권의 단행본으로 만든 책으로
1911년 운초 계연수가 적고 해학 이기가 감수함.
1979년 이유립이 공개하면서 국수적 개작의 의혹을
받고 있음.1911년 계연수가 처음 필사한 원본은 사라짐.
ㄷ.1979년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가 한국에서 환단고기 영인본을
발견하여 1982년 일본에서 일본번역본을 발간하면서 역시
개작을 하여 일본의 신도가 본류이고 단군은 지류로 해석함.
ㄹ.환단고기에는 가림토문자가 이미4000년전에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있음.
C.훈민정음에 관하여
**훈민정음은 언해본 , 해례본 , 예의본 으로 나뉘어짐.
ㄱ.언해본 ( 言解本 ) 이란 , " 말을 번역하다" 란 뜻으로 훈민정음을 처음 만들때는 한자로 된 책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다음에 그 책을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로 번역하였음. 그렇게 번역한 책을 바로 언해본이라함.
ㄴ.해례본 이란 훈민정음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각 음운들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적은 책. "ㄱ" 이 어떤 소리로 발음되는지 "ㄴ , ㄷ ~ ~" 의 글자가 어떤 입모양에서 어떤 발음으로 소리가 나는지를 적은 책.
ㄷ.예의본 이란 훈민정음을 만들때에 무슨 까닭으로 왜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세종대왕이 직접 적은 책.
▶세종대왕은 인체 발음기관을 참조하여 38자 가림토문자의
음배열을 재정비하여 28자로 줄인 뒤 훈민정음으로 명명하여
발표함. 그후 주시경 선생님이 28자를 24자로 줄임.
1927년 국어연구학회가 기관지인 "한글"을 펴내면서
우리글을 한글로 부르기 시작함.
▶1940년 경북 안동군 와룡면 주하동의 이한걸 집에서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가 상세히 기록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었다.
4.가림토문자의 역사적 의의
1.한글, 훈민정음의 기원인 가림토문자는 BC 2181년에 만들어짐.
ㄱ.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기원전(BC)과 기원후(AD)로 구분.
석가모니(BC 600년대), 공자(BC 500년대), 소크라테스(BC 400년대),
클레오파트라(BC 100년대), 이슬람교(AD 700년대).
ㄴ. 단군기원과 서력기원:고려말기 문신 백문보가 공민왕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단군기원(BC 2333 년)이 언급되어 있고 1948년 정부 최초
헌법에는 단군기원을 기준하였으나 5.16군사정권이 서력기원을 기준함.
ㄷ. 라틴어를 기반으로 한 영어는 BC 1000년 전후로 만들어졌음.
ㄹ.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제1호인 BC 431년경 건축된 파르테논 신전 보다
약 2~3000년이 앞선 이집트의 스핑크스, 피라미드, 룩소신전 등이
후 순위에 매겨져 있음. (문화를 지키는 것은 힘의 논리에 좌우)
2. 슈메르왕국, 배달국, 단군조선, 이집트
BC3500년경 지금의 이라크지역에는 슈메르왕국이 있었고
이집트문명은 BC3000년경에 형성되었다.
한반도에서는 기록이 미흡한 환국은 제외하여도 BC 3898년경
홍익사상을 건국이념으로 삼고 녹도문자를 사용한 배달국과
BC 2333년 단군조선의 기록이 있음.
3.녹도문자 ( BC 3898~2333년), 가림토문자 ( BC 2181년),
슈메르문자( BC3500년~약 BC2000년)는
비슷한 시기에 사용되어졌는데, 이것은 이집트 상형문자 보다
몇 백년에서 약1000년이 앞서며 그 중에 한글과 모양이 같은
가림토 문자가 가장 과학적인 인류 최초의 소리 문자이다.
▶중국에는 고구려 옛수도 집안지역을 중심으로 약 1만2000여개의 피라미드가 있는데 고구려시대에 만들어진 무덤일뿐이라고 주장하며 고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있음.
▶슈메르어와 한국어의 공통점
ㄱ.언어의 특징에 있어 슈메르어는 한국어 같은 교착언어로서 우리말처럼
주어나 목적어 다음에 '은, 는, 이, 가' 등이 붙는 언어를 의미한다.
이는 우랄 알타이언어의 공통된 현상이다
ㄴ.문법 구조에 있어서 슈메르어는 '주어+목적어+동사'이다.
이는 영어 혹은 중국어와는 다르고 우리말과는 같은 구조이다.
ㄷ.유사한 언어가 많고 특히 수사(數詞)가 같다.
예) 슈메르어는 처음 1을 '아스 as'라고 하는 데
이는 <삼국유사> 고(古)한국어의 그것과 일치한다.
처음 빨래를 '아시 빨래'라고 하며 아침은 '아사'라고 하는 것이며
해 뜨는 아침을 의미하는 Asis가 여기서 유래한다.
4. 선조의 역사를 바르게 지키고 또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여
후세에 물려주는 것은 현대인의 책무이다.
수메르 문명과 녹도,가림토 문자의 존재는 세계사를 다시
쓰야할 만큼 중요한 것이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고 인정되는
수메르문화보다 한민족문화가 더욱 이른 시기에 발현되었으며
인류문명의 필수요소인 문자 발명에 관한 한 우리 한민족이
종주국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유럽문화의 큰형님이라 불리는
그리이스 문화 보다 2000~1500년이앞서고 이집트 문화 보다
수백 년이 앞서는 동이족의 문화는 외침으로 인해 스스로를
보존, 계승되지 못하여 현재 한민족문화의 계승과 발전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다. 오늘날 한국 고대문명이 진위여부를 두고
논란을 야기하는 것은 각시대에 권리를 행사한 식자층의
아집과 역사의식결여에 책임이 있을 것이다.
온갖 어려움을 이겨낸 선대서민문화의 강인성에 감사하며
하루 바삐 남북통일을 이룩하여 북한에 많이 산재되어 있는
한국민의 고대유적 발굴, 연구 및 규명를 통하여
한민족의 문화정체성을 공고히 하여야 한다
한자도 우리가 만든 우리의 문자
왼쪽부터 낭하리 고각, 영변지에 실린 녹도문, 창힐문자, 요녕성 여대시 윤가촌에서 출토된 고조선 토기의 문자, 은나라의 갑골문
삼라만상(森羅萬象)에 음양(陰陽)이 있듯이, 우리글에도 음양의 짝이 있다.
한글은 양이요, 한자는 음이다.
한자의 시조로 불리는 창힐은 배달국시대 제14세 치우천황의 후손으로 동이사람이다. 초기의 문자로서 실증된 최초의 자료는 갑골문(甲骨文)이다. 거북이 배뼈와 소 어깨뼈에 주로 새겨진 갑골문자는 3천4백년전 중국 은(殷)나라 때 사용된 것으로, 황하 이북 은나라 도읍지였던 지금의 안양(安養)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명지대 진태하(陳泰夏) 교수(국문학, 한국 국어교육학회 회장)는 대만에서 문자학을 연구하면서 갑골문에서 북방민족이 아니면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특징을 발견하고 지금까지 연구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결론적으로 ‘漢字’라는 명칭은 옳지 않으며, 고대 한민족의 글이라는 ‘고한글(古韓契)’ 혹은 ‘동방문자(東方文字)’ 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교수는 또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표의문자도 만들었고, 가장 과학적인 표음문자도 만들었다. 세계에서 유일 무이한 이 일은 한민족의 큰 자랑이다’라고 강조한다.
이것이 입증되는 날,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는 한글 전용론자들과 한자와 한글을 혼용해야 한다는 논쟁 자체가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한글은 한글로서의 장점이 있고, 한자는 한자로서의 장점이 있다. 이 둘을 합하여 쓸 때 가장 합리적이고 완벽한 언어가 된다. 다시 말해 한자와 한글의 혼용은 음양의 합덕인 것이다.
자랑스런 우리 글의 이름, 한글
왜 한글이라고 할까?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한’이란 자를 애용해 왔다.
현재 우리 나라의 국호가 한국(韓國)이라는 점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한의 뜻은 왕, 수장, 우두머리, 하나, 크다, 바르다, 많다, 밝다, 훌륭하다, 하느님 등 여러 가지 좋은 뜻이 담겨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28자를 반포할 당시 훈민정음이라 불리어졌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언문(諺文), 언서(諺書)라고도 했으며, 그 후에는 반절, 암클, 아랫글, 가갸글, 국서, 국문, 조선글 등의 이름으로 불리면서 근대에까지 이르렀다.
그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불리던 명칭은 ‘언문(상말을 적는 상스러운 글자)’이었다.
그러나 개화기에 접어들어, 언문이라는 이름은 사대주의에서 나온 이름이라 하여, 주시경 선생께서 비로소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이 명칭이 일반화한 것은, 조선어학회에서 훈민정음 반포 8주갑이 되던 병인년 음력 9월 29일을 반포 기념일로 정하여 처음에는 ‘가갸날’이라고 부르다가 1928년에 ‘한글날’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면서 부터이다.
‘한글’이라는 명칭의 뜻은 ‘한나라의 글’, ‘큰글’, ‘세상에서 첫째 가는 글’등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한글’은 한나라, 한겨레와 함께 영원히 뻗어나갈 글이요, 큰 글이니, 남녀노소 모두 한가지로 넓고 크게 써야할 글이며, 세상에서 첫째 가는 글이라는 뜻이다.
출처 : 2007. 10. 9. 인터넷서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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