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대 앞으로 뚜벅뚜벅 나간 대통령
5.16 47주년이 되는 올해 유난히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회고가 이어지는 것은 47년전만큼이나 요즘의 세상에 국민들이 무기력해진 것은 아닌지. <데일리안>은 동화작가이자 출판편집인인 김인만 씨로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내외분의 일상과 당시 에피소드 등을 담은 ´그리운 나라, 박정희´를 연재한다.<편집자 주>
[데일리안 김인만 작가]서울대의 종합캠퍼스는 1960년대 말부터 건설을 위한 사업이 진행되어 관악산 기슭으로 자리를 잡고 1971년 4월 2일에 기공식을 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시내에 흩어져 있던 국립서울대학의 캠퍼스를 한곳에 통합해 건설하는 의의를 담은 친서를 서울대 총장에게 전하고, 기공식 후에는 건설현장에 나가 공사의 진척상황을 살폈다.
“서울대학에는 여학생도 적지 않은데 관악산의 뱀이 구내에 못들어 오게 할 방책도 마련해 보시오.”
현장의 학교측 책임자에게 이런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 관악캠퍼스 건설사업에 대하여 서울대를 변두리로 쫓아낸다는 소리가 적지 않았다. 데모하는 학생들이 귀찮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한곳에 모아두면 데모를 막기도 편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관악캠퍼스 기공식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14일에는 홍릉의 서울연구개발단지 기공식이 있었다. 서울연구개발단지는 1969년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들어서고, 한국과학원, 국방과학연구소, 한국개발연구원이 들어오게 되는 한국 과학기술의 요람이다.
기공식에 참석하러 가는 대통령과 경제기획원장관(김학렬), 과학기술처장관(김기형) 등의 차량이 신설동을 지나 안암동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차량이 홍릉 쪽으로 가는 도중 갈림길에서 직진해야 되는데 급히 우회전했다.
“왜 돌아가려는 거야?”
1호차에서 박정희가 물었다.
“학원 소요로 도로 사정이 안 좋습니다.”
학생들의 투석이 격렬해 경찰이 대치 중이라고 비서관이 보고했다. 그날 서울대 사대에서는 교련(敎鍊) 반대 데모가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대학가는 봄학기 개강과 더불어 교련 철폐 요구가 빗발쳤고, 이는 대통령 박정희의 3선을 앞둔 4월 27일의 제7대 대통령 선거 일정에 민감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선거 때문에 우물쭈물한다면 박정희가 아니다.
“상관없어. 바로 가.”
승용차 행렬이 청량리에 있던 서울대 사범대학 앞에 이르자 돌과 연탄재가 무수히 날아왔다. 1호차는 사이렌을 울리며 속력을 내는 경찰 백차를 뒤따라 시위 현장을 신속히 빠져나가려 했다.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가 ‘탕!’ 충격음을 내며 1호차에 떨어졌다. 박정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차 세워!”
그가 차에서 내리자, 수행원들은 아연 긴장했다.
돌을 던지던 학생들은 세단차에서 검은 얼굴빛에 키 작은 사람이 내려서 학교 정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을 보고 처음엔 누군지 알지 못했다. 경호원들이 재빨리 거총자세로 에워싸고 경찰이 겹겹으로 진을 치자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대통령이다!”
“박정희다!”
그 소리에 학생들이 놀란 참새들처럼 정신없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학생들은 교정 안쪽으로 뿔뿔이 사라져 숨어버렸다.
◇ 6.3사태로 불리는 1964년 6월3일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 중대한 국가 현안에 대해 박대통령은 저항의 장벽을 당당히 돌파해 나갔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요즘 ‘6.3동지회’ 멤버 대통령 이명박이 국정 현안에 대한 저항에 직면해 있다. ⓒ정부기록사진집
박정희는 대학구내 학생처 사무실까지 들어갔다.
“학생 지도를 똑바로 하시오. 이럴 때일수록 총장 이하 교수들이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야 하지 않겠소?”
학교 관계자들을 질책하고 경찰에게 명령했다.
“손에 흙 묻은 놈들 다 잡아넣어!”
그런 다음 다시 차에 올랐다.
대통령 승용차 행렬은 지체없이 교정을 떠나 홍릉의 서울연구개발단지 기공식 현장으로 갔다.
박정희는 기공식 치사를 통해 “선진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우리의 토착기술을 개발하여 근대화 과정을 단축시키고 수출증대로 국력을 더욱 증강해야 한다”면서 과학기술의 발전이 곧 경제성장을 좌우하는 중요한 열쇠임을 강조했다.
그날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정사복 경찰 1백여명이 서울사대 교정 안팎을 샅샅이 뒤져 학생 70여명이 동대문경찰서에 끌려갔다.
서울연구개발단지 기공식을 마치고 돌아온 박정희는 학생들을 그날 밤 안으로 전원 석방하라고 다시 지시했다. 학생들은 혼쭐이 난 뒤 풀려났다.
1975년 10월 이후 세차례 청와대에서 단독회견을 했던 일본의 문화평론가 후쿠다 쓰네아리(福田恒存)는 대통령이 학생 데모가 벌어진 서울대 사대에 들어갔던 일에 대해 질문을 했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학생들이 설득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소. 총장과 교수들이 학원 소요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책임감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대통령이 데모하는 학생들을 향해 학교 교정까지 들어간 일의 배경에는 당시의 긴박한 안보 상황이 있다.
1971년 그해 3월 미국은 닉슨독트린의 일환으로 한국 정부와 한마디 상의없이 갑자기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시켰고, 남북의 세력균형이 깨지자 김일성의 북한은 기세가 등등해 “수령동지의 환갑을 서울에서!”라며 미쳐 날뛰고 있었다.
믿을 것은 오직 우리 힘뿐이니 국산 무기를 하루 빨리 개발해야 한다는 절박한 소리가 나오는 판국에 정치적 반대자들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향토예비군 철폐와 국군 감축을 주장해 대중을 선동하고, 학생들은 교련 철폐를 외치고 있었다.
“만일 북이 쳐내려온다면 나는 서울에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오.”
박정희는 말했다.
씁쓸하게 웃는 대통령을 보며 후쿠다 쓰네아리는 “그 미소 속에 그분의 고독을 읽었다”고 전하고 있다.
최고 권력은 최고의 책임을 동반한다. 최고지도자로 일컬어지는 대통령은 마땅히 중요한 국가 현안에 대해 가장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 대통령 박정희의 국가경영에서 드러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책임지는 권력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1968년 주민등록증 발급으로 국민 개개인이 고유의 주민등록번호를 갖게 되었을 때 박정희는 최고책임자로서 당연하다는 듯 번호 조합체계로 첫번째에 해당하는 번호를 가졌다. 대한민국 ‘주민등록번호 1번’의 주인공은 박정희였다.
책임의식이 강한 만큼 권력 행사도 강력했다. 나라가 가난한 것이나 나라를 지키는 일도 과거를 탓하거나 어떤 구실도 앞세우지 않고 모두 자기 책임으로 부둥켜안고 국가경영을 지휘했다. 중요한 국정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는 정치적 갈등과 반대 데모 등 적지 않은 저항에 부딪쳐야 했지만, 어떠한 경우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통치철학과 소신에 따라 저항을 당당히 돌파해 나갔다.
박정희의 ‘주민등록번호 1번’은 대한민국 최고지도자의 키워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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